작가 차인표, 그의 진심이 담긴 이야기
나는 편견이 없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적어도 누군가를 함부로 평가하고, 제멋대로 잣대를 들이대는 그런 한심한 사람은 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해왔다. 그러나, 어쩌면 내가 그런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낯부끄러운 사실을 깨닫게 해준 책이 있다.
지난해 가을, 배우 차인표의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영국 옥스퍼드대 한국학 필독서 선정’이라는 뉴스와 함께 그의 얼굴이 포털 메인에 걸렸다.
“연예인들은 인생 참 쉽네.”
그 뉴스를 보며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연예인이니까 쉽게 책을 내고, 그 책은 금세 베스트셀러가 되고, K-문화의 인기에 편승해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것이리라 간단하게 짐작하고 말았다. 드라마 밖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책 내용이 어떤지 궁금해하지도 않았고, 책을 펼쳐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배우 차인표의 작품은 단 몇 초 만에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잊힌 이야기를 끄집어낸 사람이 있었다.
“차인표 소설, 읽어보셨어요?”라는 한마디 말로.
어땠냐는 질문에 “기대 이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던 이야기가 문득 궁금해졌다. 배우 차인표가 아닌 작가 차인표가 ‘위안부’라는 아슬아슬한 역사의 증인을 어떻게 그려냈을지 호기심이 일었다.
소설은 1931년 백두산 자락, ‘호랑이 마을’에서 시작된다. ‘영롱한 이슬방울’, ‘스멀스멀 걷히는 안개 바다’, ‘산머루처럼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 ‘깜짝 놀라 파드닥 날아가는 새’. 서정적인 단어들로 그가 그려낸 호랑이 마을의 풍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놀랍도록 따뜻했다.
딱 한 발의 총알만으로 호랑이의 숨통을 끊는 천하제일의 명포수로 알려진 황포수. 그는 아내를 물어 죽인 백호를 잡기 위해 아들 용이를 데리고 호랑이 마을로 향했다. 호랑이 마을은 이름처럼 호랑이들이 자주 출몰해 평온한 삶을 뒤흔들어 놓는 곳이었다. 그런 마을에 최고의 포수가 나타났으니 황포수와 용이가 사람들의 환대를 받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환대는 언제나 조건부다. 총을 훔쳐 영웅이 되려던 엄대가 목숨을 잃자 마을 사람들의 환대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쫓겨나다시피 산으로 떠밀려간 용이는 호랑이 마을에서 정을 나누었던 순이와도 그렇게 헤어졌다.
산과 들의 풍경은 곱디고운 말로 세밀하게 묘사돼 있었고, 여우 마을이나 곰 마을로 마을 이름을 바꿔 적어도 어울릴 만큼 그 시절 시골 마을의 정서가 정감 있게 담겨 있었다. 옥스퍼드대 한국학 필독서로 선정된 것은 우연도, 마케팅의 산물도 아니었다.
그의 문장에는 공들인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서정적인 단어로 가득한 각 문장의 끝맺음은 항상 경어체였다. 다정하면서도 친절하고, 포근하면서도 단정한 그의 문장은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 학생들이 차근히 음미하며 읽고 배우기에 딱 적당해 보였다. 순이와 용이가 밤하늘에 떠 있는 엄마별을 바라보며 위로받았듯,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 학생들은 아마도 오래오래 이 책을 길잡이별 삼아 한국어를 배우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소설이라는 건 원래 뒤집히고 꺾이는 반전이 있어야 제맛이긴 하다. 뻔하게 흘러가는 이야기는 어느 순간 시시해지고 희미해진다. 그러나 나는 급류가 휘몰아치는 식의 반전을 원래 즐기지 못한다. 안 좋았던 상황이 점점 좋아지는 쪽으로의 반전이야 상관없지만 평온하고 잠잠했던 삶이 송두리째, 그것도 더할 수 없을 정도로 폭력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반전은 견디기가 어렵다.
잘 짜인 이야기답게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에도 반전이 있다. 언제까지나 평온할 것만 같았던 호랑이 마을에 일본군이 들이닥친 것이다. 물론 한국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딱히 반전이랄 것도 없는 전개이긴 하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구나 짐작할 만한 단서들이 처음부터 책 곳곳에 숨어 있었으니 마침내 시간이 흘러 그런 파국이 벌어진 건 예상 가능한 결말인지도 모른다.
인구가 135명밖에 안 되는 호랑이 마을을 일본군이 장악하면서 이야기는 후반부로 접어든다. 그들은 14~25세에 해당하는 단 한 명의 소녀, 순이를 위안부로 끌고 갔다. 어떤 읍소에도 꿈쩍하지 않으며 총칼로 마을 사람들을 위협하는 일본군. 그런 일본군에게 끌려간 순이를 구하려고 목숨을 거는 또 다른 일본인 장교 가즈오. 호랑이 같은 전투력으로 일본군의 손아귀에서 순이를 구해내는 용이. 돈을 벌기 위해 기꺼이 일본군 앞잡이 노릇을 하며 백두산 산길을 안내하는 포수들. 이야기의 후반부에는 사랑, 배신, 충성, 절망, 탐욕 같은 인간의 욕망이 뒤엉켰다. 순간순간 숨이 막혔지만 어차피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넘어갈 만했다. 그러나 그저 소설 속 한 대목이기만 했다면 좋았을 법한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는 사실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위안부를 둘러싼 논쟁은 여전히 뜨겁다. 휴화산처럼 조용한 시기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상황이 제대로 마무리돼 사화산처럼 평온해질 날은 멀다. 피해를 본 사람은 있는데 피해를 끼친 이들은 뜨뜻미지근한 면피용 사과와 ‘증거 있어?’라는 식의 발뺌만 반복한다.
차인표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원래는 응징하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할머니들이 그들을 용서해주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라며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바란다고 적었다. 그런 일이 언제쯤 가능해질지 문득 궁금하다. 책을 읽고 관련 자료들을 한참 뒤지다 보니 일본 네티즌들도 여자들을 강제로 끌고 간 적은 없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그대로 믿는 눈치였다. 혹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한국 ‘침략’을 ‘진출’로, 토지 약탈을 ‘토지 소유권 확인’으로,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말로 지나간 시간을 설명하는 역사 교과서를 읽으며 자랐을 테니 당연한 결과일까?
올해 세상을 떠난 나의 외할머니는 그 시절의 목격자다. 젊은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끌고 갔던 그 시절을 할머니는 기억했다. 일본군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할머니는 터무니없이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중 생존자는 6명에 불과하다. 그 고통을 직접 겪은 피해자가 줄어들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시절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도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피해자도, 목격자도 모두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는 이 기울어진 게임의 최종 승자가 가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시절을 직접 겪고 목격한 사람들이 모두 사라지더라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할 책임이 우리한테 있다.
이 책을 덮으며 나는 다시 한번 다짐했다. 섣부른 편견에 휘둘리지 않겠다고. 베스트셀러든 아니든 옥스퍼드대 필독서든 아니든 작가 차인표가 진심을 다해 이 책을 쓴 건 분명했다.
오해해서 미안합니다. 작가님.
작가의 말처럼, 나 역시 언젠가 할머니들이 그들을 용서해주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나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반드시 전제돼야 하는 조건이 있다. 바로 그 누군가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할머니가 그들을 용서해주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작가의 문장은 어쩌면 ‘그들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라는 진심을 에둘러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고, 그 뒤에 서로 화해하는 그런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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