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리틀턴의 모든 엄마들이 아이가 안전하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나는 우리 아이가 남을 더 해치기 전에 죽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했어요.” 세월호 참사나 이태원 압사 참사를 떠올려 보더라도, 생면부지의 모르는 이들도 그저 한명이라도 더 무사하길 기도하는 것이 보통 사람의 마음일 것이다. 하물며 그 대상이 자기 자식인데 살기 대신 죽기를 바라는 엄마라니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라는 제목만큼 충격적인 고백이었다. 1999년 콜로라도 주 리틀턴에 위치한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는 총기 난사로 학생 12명과 선생님 1명이 숨지고 2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 일은 미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사건 중 하나로 알려졌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는 두 명의 가해자 중 한 명인 딜런 클리볼드의 엄마, 수 클리볼드의 기록이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매달 학교 도서관에서 사서 봉사를 했다. 도서관 한 켠, 선생님과 학부모를 위한 서가에서 이 책을 보고 호기심에 펼쳐 들었다. 비록 몇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너무 눈물이 나 책을 덮었고 나머지 부분은 집에서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최선을 다해 키운 아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기가 막힌데, 같은 학교 학생들을 총으로 쏴 죽인 후 그런 선택을 하다니, 상상만으로도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자살, 우울증, 총기 난사, 차라리 본인들이 대신 죽고 싶다고 느끼는 부모의 마음. 죄책감, 변명하고 싶은 욕구. 당시 읽는 내내 마음은 아팠지만 그 뿐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5~6년이 지나 사춘기 자녀를 둔 엄마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를 다시 마주했을 때, 처음과는 다른 마음으로 책을 읽어 내려가는 나를 발견했다.
눈빛 한번, 말 한 마디에 아이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는 믿음
아이들이 태어나고 몇 년 동안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먹는 것, 자는 것, 노는 것, 싸는 것, 입는 것, 어느 것 하나 정성을 기울이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아이의 세상은 오직 부모뿐이었기에, 우리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이 곧 아이의 전부라 생각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그 세상을 좋은 것들로만 채워주고 싶었다. 우리 부부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부모들 역시, 각자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을 쏟으며 아이를 키우느라 나름의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부모가 아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말을 건네느냐에 따라 아이 삶이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수 클리볼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1999년 4월 20일, 경찰이 집에 들어닥치고 심문을 당할 때까지도 클리볼드 가족은 무슨 착오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딜런은 공범인 에릭과 함께 많은 사람들을 죽이려는 의도로 식당에 폭탄을 설치했고, 그 폭탄이 불발하자 준비해온 총으로 눈 앞에 보이는 학생들을 직접 쏴 죽이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아이들,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아이들을 비웃고 오히려 공격했으며 인종주의적 혐오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수는 자신의 아이가 이런 엄청나게 폭력적인 일을 벌인다는 것을 꿈에서조차 생각해 본일이 없었다.
“여행 도중 미국 최고높이의 로열 협곡 현수교를 건널 때 나와 다른 엄마가 겁이 나서 한 발 떼기를 주저하고 있는데 딜런이 가던 길을 깡총거리며 되돌아와서는 놀리고 달래고 격려하면서 우리를 끌고 갔다. 아직도 그 손의 감촉이 내 손에서 느껴진다.” (125p)
수가 느끼기에 딜런은 큰 문제없이 지내온 평범한 가정의 아이였다. 수도 나처럼 자신이 최선을 다해 사랑을 주고 믿어주면 딜런이 잘 클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딜런에게 온갖 사랑과 정성을 기울였을 수를 생각하니 같은 엄마로서 가슴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남들과 다르지 않고 사랑스러웠던 어린 시절 딜런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사춘기의 아이들과 멀어지다
부모가 세상의 전부였던 아이들은 금세 친구밖에 모르는 십대가 되었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접어들면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만큼은 다를 거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무색하게도,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자 방문은 자주 닫히기 시작했고, 친구들과의 통화는 끝날 줄 몰랐다. “엄마랑은 대화가 안 돼!”라는 말을 처음 들은 날,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차갑게 선을 긋고 입을 꾹 다물다가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며 공감을 구할 때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부모와 척진 것은 아니었지만,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좋고 중요해졌다. 부모와의 시간은 자연스레 줄었고 우리가 모르는 아이의 사생활이 늘어나면서 서로에게 조금씩 거리가 생겨났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각자의 생활을 인정하는 것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십대의 아이들에게 부모의 애정과 관심은 간섭과 족쇄일 뿐이었다. 궁금한 수많은 것들을 일일이 물을 수 없었기에, 고르고 골라 꼭 알아야 하는 질문을 신중하게 선택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일을 최소화했다. 열심히 키웠으니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과 마음만으로 아이들을 지지하고 응원했다. ‘정말 나 없는 데에서도 애들이 잘 하고 있을까.’ 한 번씩 불쑥 찾아 드는 두려움을 애써 모른 척하며 한동안을 보냈다.
겉보기에 보통의 사춘기 소년 딜런을 보며, 수도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며 그 시기를 견디지 않았을까. 지금은 사춘기라 멀어졌지만 이 시간만 지나고 나면, 다시 어렸을 때의 딜런으로 돌아오리라는 믿음으로 가끔씩 찾아오는 불안한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딜런이 어릴 때만큼 속을 잘 드러내고 애정 표현도 많이 하고 말도 많이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나이 남자아이들이 다 그렇지 않나? 딜런이 3학년 때 문제를 일으키기 전에는 앞으로 일어날 비극을 예감할 만한 일이 우리 가족의 삶에서 한 가지도, 단 한 가지도 없었다. “(47p)
부모가 되어 어떻게 모를 수 있나?
수는 딜런이 그런 일을 벌이기 전까지는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건 가해자의 가정환경이나 가해자 부모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끔찍한 폭력이 벌어졌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나도 범인의 가족은 어떤 이들일까 생각했었다. 부모가 가엾을 아이에게 어떻게 했길래 저런 사람으로 자라났을까 생각했다. 따뜻한 환경에서 사랑으로 키운 아이는 절대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족에게 책임이 있다는 설명을 언제나 한 치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169p)
나 역시도 부모, 자식 간에 사이가 벌어지거나 아이들이 비뚤어지게 되는 것은 가정환경이 좋지 않거나 부모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막상 사춘기 자녀를 겪어 보니, 상황은 내가 확신해 왔던 것과는 달랐다. 충분히 사랑을 주고 최선을 다해 육아를 했건만, 욕을 하거나 화장을 하는 등 내가 평소에 불량 학생들이나 할 법한 짓이라고 여기는 행동들을 내 아이들이 하고 있었다. 내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별다를 것 없이 비슷한 언행을 한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내가 가르치지 않고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어도 아이들은 자신들의 판단 하에 배우고 익히고 행동했다. 열심히 부모의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도무지 아이들의 언행이 어느 방향으로 튈 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부모라면 아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알았을 것이다. 몰랐다는 건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더라도 사람들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425p)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제대로 된 부모였다면 아이에게서 무언가 잘못된 신호를 읽을 수 있었어야 한다고 수 부부를 비난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때였다면 나 역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느끼지 못한 수 부부에게 많은 책임이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럭비 공 마냥 예측불허 사춘기 아이들을 겪어 본 지금은 수 부부의 상황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키웠다고 해도 아이들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 수 있다 속단한 것은 참으로 오만한 일이었음을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사랑의 노력은 계속된다
“딜런이 죽었는데도 나는 딜런 걱정을 많이 했다. 딜런이 저지른 죄 때문에 딜런의 영혼이 편히 쉬지 못할까 두려웠다. 딜런이 살면서 고통받았다는 것만으로도 괴로운데, 죽어서도 계속 고통받으리라는 생각을 견딜 수가 없었다. (414p)”
남들에게 끔찍한 범죄자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수에게는 분명 하나뿐인 막내 아들이었다. 끔찍한 죄를 짓고 죽었기에, 수는 죽어서도 편안할 수 없을 딜런의 영혼을 걱정했다. 이해할 수 없는 악을 저지른 아들을 어떻게든 이해해 보고자 계속해서 애쓰는 수의 사랑이 참 애달펐다. 날선 말을 하고 문을 쾅 닫고 돌아서는 딸아이의 뒷모습만 봐도 절로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소리가 절로 나오고 아이가 얄밉게 느껴지곤 했다. 그런데 그 모든 죄와 고통을 남기고 간 딜런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금껏 어떤 엄마였을까, 앞으로는 어떤 엄마가 되어야 할까 자꾸만 고민하게 되었다.
몇 주 전, 친정 부모님이 하룻밤 머물다 가셨다. 오랜만에 삼대가 함께 하는 아침식사를 차렸으나 정작 나는 입맛이 없어 커피만 챙겨 식탁에 앉았다. “속 버릴라, 계란이라도 하나 먹고 커피 마셔야지.” 내일 모레 쉰인 나도, 칠순의 엄마 앞에서는 아직도 챙겨 줘야하는 딸이었다. “세상 모든 곳에 신이 존재할 수 없기에 어머니를 세상에 보내셨다.”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내가 딸의 입장이었을 때는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이 말이, 엄마가 되고 보니 엄청난 무게로 날 짓누른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고, 결과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한 예상도 불가능하며, 어떤 결과이던 부모로서 그 결과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 육아가 그 어떤 일보다 최상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좋은 엄마란 무엇일까. 아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아이가 반드시 반듯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이의 곁을 지키겠다는 다짐, 어쩌면 그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전부일지도 모른다. 영유아 육아서의 바이블로 통하는 <베이비 위스퍼>로 시작하여 책육아를 알려주는 <푸름이 아빠>, <하은맘의 불량육아>, 또 서천석, 오은영, 최성애 박사의 책까지 안 읽어본 육아서가 없었다. 그러나 그 책들을 읽으며 나는 ‘엄마’의 책임에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기만 했다. 부모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한다면 아이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는 대부분의 육아서를 읽으며, 부족하기만 한 내 자신에 실망만 늘어갔다.
이 책은 나에게 다른 메시지를 주었다. 부모로서 최선을 다하되 아이의 모든 선택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이를 사랑하고 지켜주는 것이 육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임을 깨닫게 했다. 아이의 비행에 부모가 아무런 책임도 없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부모가 올바른 방향으로 100의 노력을 쏟았다 하더라도 아이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100이 안 되는 정도의 결과를 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 아이를 키워야 하지만 동시에, 부모 역시 인간이라는 한계가 있기에 그 결과까지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어떤 아이라도 나의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육아의 본질이라고 깨달았다. 수가 겪었을 큰 고통과 괴로움은 내가 사춘기 아이들에게 느꼈던 감정에 감히 비할 수 없겠지만, 책을 읽으며 다시 한번 부모의 역할에 대해 심사숙고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