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씻긴 취미의 조각들 #001,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나는 인프피 중 'P'답게
책을 고르는 데 아무 기준이 없다.
SNS에서 누가 재밌다고 했다는 이유로,
다른 책에서 스치듯 언급된
제목 하나에 끌려서,
혹은 그냥—표지가 예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손에 들어온 책은 종종
예상치 못한 감정의 심연으로
나를 데려가곤 한다.
〈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도 그랬다.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에 놓여 있었고,
나는 그 안의 여자들의 삶을 따라
이름도 없고, 설명도 부족한 나의 감정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처음엔 어떤 구조의 책이고,
어떤 의미에서 '이름이 없다'는 건지 헷갈렸다.
익숙한 서사처럼 흘러가지 않았고,
그저 조용히 어떤 삶의 단면들이
나열된 것 같았다.
하지만 점차 알게 되었다.
이건 '한 사람의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감정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걸.
(등장인물의 설정상 더욱 철저히
감정을 숨겨야 했으나)
그리고 그 감정은 결국,
우리 모두가 품고 있는 것들이라는 걸.
배경이 너무나도 다양했다.
전쟁과 피난, 이북이라는 설정들 속에서
나는 '타인의 삶'을 따라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거리 두고,
이야기꾼처럼 읽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린 미희의 학교 친구
연주의 이야기가 나왔다.
아주 짧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조용한 대목이
나의 눈길을, 감정을, 그리고 무언가
오래된 기억을 붙잡아 끌었다.
연주의 아버지가
수용소에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연주는,
친구들 앞에서 아버지가
쿠바 외교관이라고 말하며
비행기 엔진 소리를 흉내 내고,
너무도 과장된 세계를 입으로 지어냈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그건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건 발악이었다. 안간힘이었다.
살아 있기 위한, 버티기 위한
연주의 몸부림이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갑자기 숨이 막혔다.
그 아이가 무너지지 않으려고
쥐고 있던 환상의 끈이
너무 익숙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 외교관 아니지?”
“왜 그런 거짓말을 해?”
“거짓말쟁이야.”
연주에게 그런 말이 날아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타박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아이들조차 알았던 것 같다.
그 거짓말이
진짜로 믿어달라는 말이 아니라,
그저 무너지지 않게 잡고 있는
끈 하나라는 걸.
나는 그 장면이 너무 안쓰러웠다.
그 말도 안 되는 '쿠바 외교관' 이야기와
비행기 엔진 소리를
상상으로 흉내 내던 연주가
너무도 작고 약해 보여서
그 거짓말마저 지켜주고 싶을 정도였다.
나도 물론 어릴 적
친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허세도 부려보고,
허풍도 떨어본 기억이 있다.
하지만 연주의 그것은 달랐다.
이건 슬픔이 만든 허세였고,
울음 대신 꺼낸 이야기였다.
마지막에 미희는
연주의 거짓말을 받아들인다.
비행기 엔진 소리를 함께 흉내 내고,
쿠바 외교관 이야기에 같이 올라탄다.
허구를 공유하면서 둘은 친구가 된다.
그리고 미희의 아버지가 말한다.
"가장 완벽하게 속이는 것은, 속아주는 것이다."
나는 그 말 앞에서 멈췄다.
나는 사랑하면 뭐든 알고 싶고,
이 사람의 어디가 어떤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그래서 지금껏 '속아준다'는 감정은,
사랑과는 정반대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읽고,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아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작고 슬픈 세계에 잠시
함께 있어주는 일일지도 모른다고.
비행기 소리를 흉내 내며
그 아이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