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에 씻긴 취미의 조각들 #002
어떤 우연한 계기로 뮤지컬을 보게 됐다. 처음엔 손이 바들바들 떨릴 만큼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지만 나는 그날 덕통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공연이 끝나고 엄마와 함께 차를 타고 돌아오는 길, 사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 머릿속은 온통 방금 본 장면들, 넘버들, 그리고 “다음엔 어떤 걸 볼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날 이후 나의 장대한 관극 여정이 시작됐다.
집에서는 유튜브로 넘버를 돌려보고, 원작을 찾아보고, 다음 티켓팅을 위해 새벽까지 잠 못 들었다. 그 사이, 이 작품을 본 수많은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 읽으며 또 한 번 울고 웃었다.(참고로, 나의 입덕작은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이다.)
그 뒤로 나는 감히 고하오건대, 주 1회 관극을 통해 혈중관극농도가 떨어지는 즉시 수혈을 감행했고, ‘안나의 비상금 통장’은 말 그대로 탈탈 털려버렸다. 모든 폭풍이 휘몰아친 뒤, 나는 마치 심정적으로 기둥뿌리 하나가 뽑힌 듯한 기분이었다.
항상 관극 스케줄에 쫓겼고, 다녀온 날엔 여운에 젖어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곤 했다. 심지어 “평생 공연만 보고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소강상태는 어느 순간 찾아왔다.
텅장이야 늘 중요한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결정적인 건 ‘내가 지금 이걸 기계적으로 보고 있진 않나?’ 하는 자각이었다. 넘버 하나, 대사 한 줄을 정성껏 음미하던 과거와 달리, "여긴 아는 부분이니까 잠깐 딴생각을…"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내가 뭐 하는 짓이지? 소중한 관극 시간에 집중하지 않는 건 나에게도 손해고, 배우들에게도 실례잖아!” 그렇게 나는 관극 텀을 천천히 늘려갔다. 지금은 한두 달에 한 편 정도로 혈중 농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 길고도 짙었던 1년 반은 내가 나 아닌 듯 살았으나, 한편으로는 너무나도 '나'였던 시간이다. 오롯이 관객으로서 무대를 즐기고 공연에 감정을 쏟으며 이해와 공감을 배웠고, 묵은 감정을 해소하는 법도 알게 됐다.
지금도 그때 쓴 돈을 떠올리면 살짝 당황스럽긴 하다.
하지만 그 감정과 내면의 성숙은 절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자양분이 되었다. 물론 지금 통장은 앙상하지만, 그 시절 내 감정은 아주 잘 먹고 잘 자랐다.
잘 큰 감정은 돈으로 못 사는 것이다…라고 내 카드값이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