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겁나는 일이 생겨버렸다.)
"환자님, 혈액검사 결과 CEA수치가 7.7로 나왔어요. 의뢰서를 써드릴 테니 큰 병원에 가셔서 폐부분을 정밀하게 찍어보셔요."
1년 전부터 나는 건강검진 결과, 당뇨 초기경계라고 동네 병원에서 약 처방을 권유하길래 예방 차원으로 약을 먹고 있다. 그리고 정기적으로 피검사를 하고 있는데 이번에 저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2024년 5월, 종합검진결과 모든 수치가 정상이었으나 암유무를 예측한다는 처음 들어본 이 CEA 수치가 6.5로 나와서 의사 선생님께서 권유하신 종합병원에서 복부 ct, 위, 산부인과, 대장, 내시경을 하였었다. 검사 결과 오장육부가 다 깨끗하다고 하였었다. 그런데 그 후로 불과 5개월이 지난 올해 3월 말에 7.7로 수치가 오른 것이다. 그 당시에 폐부분은 검사를 하지 않았었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고 기침 등, 이상한 증세가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께서 폐부분 정밀검사를 강력하게 권하시길래 나는 뭔가 잘못되어 가는구나 싶어서 그동안 배우고 있던 수영, 에어로폰 레슨에 결석을 하고 방구석에 사흘간 말도 없이 처박혀있었다. 남편도 아무런 말도 없이 내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4월 초에 손주가 태어날 예정인 것이 생각났다. '아, 나 아직 더 살아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드는 것이었다. 의뢰서를 들고 내가 사는 지역 인근 C대학종합병원으로 갔더니 의뢰서만으로는 2차 병원인 그곳에는 접수가 안되니까 다시 내가 사는 지역 병원에서 엑스레이와 시티를 찍어서 뭔가 나타나면 접수해 준다는 것이었다. 오미가미 차 안에서 남편과 나는 한마디도 안 했다. 다시 되돌아온 나는 남편에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친구들과 당구 치러 가라고 보낸 다음, 종합 병원 두 곳으로 달렸다.
가끔 들렀던 A병원은 당장 접수가 안되고 밀려서 한 달 뒤에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 핸들을 돌려 시내에 위치한 B종합병원으로 가니 호흡기내과 담당 의사는 한 분뿐이어서 밀렸지만 내 사정을 이야기하니 기다리라고 하더니 의뢰서를 보고는 접수를 해주었다. 내 차례가 되어 의사 선생님과 상담을 하고 바로 엑스레이를 찍고 나더니 뭔가 보인다며 다시 ct를 찍으라고 했다. 나는 땀도 나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리고 이병원에서는 시설도 빈약하다며 의뢰서를 써주면서 다시 오전에 들렀지만 퇴자를 맞았던 인근 C대학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오전에 들렀던 그 병원으로 전화를 돌렸다. 아주 급한 나의 목소리가 상담자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ct상에 나타난 그 뭔가의 크기가 얼마인지 물었고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의사 선생님 일정을 참고하여 사흘뒤에 오라고 접수를 시켜주었다. 이렇게 정해진 사흘뒤의 날, 그러니까 엊그제까지 나는 한숨도 못 자고 아무 일도 하지를 못하였다. 심지어 손꼽아 기다리던 서울 사는 아들 녀석에게서 들려온 손녀탄생의 기쁨도 잠시, 나의 생각은 온통 그 뭔가 하는 ct상의 희미한 그림자 그것뿐이었다. 그리하여 다가온 그날, 바로 어제 나는 남편과 달렸다. 준비해 간 cd를 복사하여 접수하고 내 순서가 되었다. 제발, 제발 염증덩어리라고 해주셔요, 하고 간절히 빌고 빌었다. 의사 선생님은 준비해 간 의견서와 사진을 보시더니 크기는 크긴 하지만 다시 순서대로 피검사를 해보고 염증일 수도 있으니 염증제거약을 1주일간 먹어보고 그 약이 흡수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피검사를 해보고 또다시 정밀 ct를 찍어보자고 하셨다. "선생님, 암은 아닌가요?" " 글쎄요, 검사를 다시 해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선생님, 암인 경우 수술은 어려운 것은 아닌가요?" " 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정말 암울한 며칠간의 희미한 시간들이었는데 조금은 순서가 정해지고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나니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기는 했다. 사실 최근 1,2년 사이에 친정 엄마와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그 모습들을 세세하게 보아왔던 터라 나는 집안 전체를 깔끔하게 정리를 했었다. 물질뿐만 아니라 마음도 비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내 앞에 큰 병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여러 가지 상황이 나타나니 나는 정말 약한 존재임을 알았다. '아니야, 아직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데? 이쁜 손녀가 태어났으니 재롱도 좀 더 봐야 하고, 수영도 배웠는데 지인들과 호캉스 가서 수영솜씨도 자랑해야 하고, 남편 칠순에 에어로폰 연주도 해야 하는데?' 등등 잡다한 생각이 떠오르면서 '아 지금 이 순간! 마저 나에게는 너무나 중요하다.' 싶었다.
다음 주 토요일 내 생일이라고 딸내미가 온다고 전화를 하였다. 나는 오지마라고 했다. 그냥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아직까지 검사를 몇 번이나 더해야 할지 모르지만 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리를 하고 싶었다. 제발 큰 병이 아니기를 기도하며 간절히 바라고 있는 이 즈음에 나 자신을 보니 언제부터인가 기가 팍 죽고 자존감도 완전 바닥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한순간에 내가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남편이나 나는 먹고 싶은 것이라고는 그냥 막국수 한 그릇이고 가보고 싶은 곳이라곤 그저 남편의 군복무 시절이었던 강원도 양구였고, 남에게 싫은 소리 안 듣고 안 하면서 자식들 편하게 사는 것 보는 것이 꿈이었다. 이런 우리 부부의 소소한 바램에 넘치게 해외여행도 작년에 남편과 처음으로 갔다 오고 제주한달살이도 해봤다. 이제 아들에게서 친손녀, 딸에게서 외손자를 보았으니 나는 다 가진 것 같았다. 아직도 욕심이 남았나 싶지만 이제 65세인 내가 조금만 더 살고 싶은 것은 큰 욕심일까?
어제 새벽 미사에 가서 하느님께 빌었다. '하느님, 저 아직 조금만 더 살고 싶으니 별일 없을 거라고 말씀해 주셔요,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