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창문을 흔드는 바람과 함께 비가 거칠게 내린 하루였다. 설날 준비 장을 보고 집으로 출발하기 전, 혹시나 싶어서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나요?" "음, 검은콩강정, 부채과자, 통팥빵, 그리고 등등" 남편이 나열하는 것은 물을 때마다 비슷하다. 어릴적 먹고 싶었는데 실컷 못 먹었다는 것들이다. 평소에 좋아하는 반찬도 부추김치, 생선구이, 두부조림, 김구이, 된장찌개, 꽈리고추 넣은 멸치조림 등 아주 구체적이다. 그런데 사시사철 저런 종류의 반찬을 돌아가면서 식탁에 올려도 싫다는 소리를 안 한다. 맛없다는 말도 안 한다. 늘 한결같이 먹을만하고 없어 못 먹는단다. 그랬던 남편이 요즘 들어 표현 방법이 조금 달라졌다. " 아, 오늘 물김치는 심심하면서 깔끔하네." "오늘 호박전은 구수한 맛이 나는데 무슨 가루로 했노?" "먹을만하네"라고만 표현하던 사람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표현을 하니 음식하는 내가 신이 나서 고민을 하게되고 자꾸 요리 유튜브도 보게 되었다. 옛날 엄마가 해주시던 전통 우리 음식맛에 길들여진 남편이나 나는 4계절 한식 밥상이다. 이런 시골 입맛을 지닌 우리 부부를 서울 아들 내외가 대접한다고 서울 번화가 한정식집에서 밥을 산 적이 있다. 우리는 그날 기절초풍할 뻔했다. 이유인즉, 밥값에 놀라고 반찬 양에 놀라서이다. 아기 손바닥만한 접시에 한 번 젓가락질을 하고 나니 없어지는 양들이었는데 먹고 계산할 때 옆에서 듣고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정도로 비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지금도 그 밥 사건이라 부르며 헛돈 썼다는 말을 하면서도 그래도 살아생전 좋은 경험했다 하며 웃곤 한다. 아들, 딸 결혼시키고 나니 이제 우리 할 일은 다 했다 싶어서 뭐 좀 나은 것도 먹고 하고 싶은 것도 하자 싶은데 여태껏 살아온 방식을 고치기 어렵나 보다. 현관 앞에 택배가 있어 뭔가 했더니 남편이 인터넷으로 주문한 케쥬얼 구두였다. 이제 조금이라도 좋은 브랜드 구두를 사서 신지 그러냐고 하니 이것도 가볍고 편해서 신을만한데 굳이 비싼 걸 사냐했다. 그 구두를 거실 탁자 위에 두고 어린애처럼 요리조리 만져보고 구두끈을 다시 매는 것을 보니 참말로 소박하구나 싶다. 더구나 오늘처럼 사나운 비가 오는 날에 저녁밥을 뭘 할까 걱정하니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단다. 내가 참말로 못 산다. 이제 내 남편이 남은 인생 좀 비싸게(?) 살았으면 싶다. 그렇게 살아도 되는 인생인데 늘 한결같은 내 남편이다. 친구들은 그랬다. 호강스러운 소리하지 말라고. 자랑하냐고. 그러니 또 그런가 싶다. 소박한 내 남편에게 연민의 정이 팍팍 솟아올라 내 마음이 더 따뜻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