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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 너의 어머니

(불러도 대답 없는 나의 어머니, 부르면 나타나는 너의 어머니)

by 김수기

어머니


토담 울타리아래 들꽃 가득 심어 고운 여심(女心) 가꾸시던

나의 어머니

이제는 돋보기를 코에 걸치고 지나온 일흔 세월을 다듬습니다.

"엄마아……"

마흔 넘은 딸내미가 대문 넘어서며 부르면

삯바느질하시느라 휘어버린 굽은 등 세우시며

달려 나와 안아주십니다.

어제도, 내일도 어머니한테 가면

고슬고슬한 밥에 맛난 반찬들이 반겨줍니다.

"힘들지? 사는 게 그렇단다."

세련된 언어는 아니지만 어머니가 내게 주신 모습은

기대며 살아온 큰 언덕이었습니다.

이제 훌쩍, 내 키를 넘은 딸아이

아파트 뒷산 새벽달 떠 있는 시간까지

잠 못 이루고 불 켜진 방을 엿보면서

내 어머니의 가르침을 주고 싶습니다. (2001, 좋은 책과의 만남에서)


위 시를 적었을 때는 나의 딸아이가 고3이고 내 친정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이다. 교사들을 위한 장학자료에 실렸던 것인데 그때의 고3 딸이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현재, 유치원 아들 하나를 키우며 직장 생활을 하면서)마흔을 바라보고 있다. 매일 손자와 영상통화를 해주는 사위와는 다르게 딸아이는 늘 바쁘다 그랬고 내가 어쩌다 하는 전화도 용건만 묻고는 회의 중이라고 한다. 그런 살갑지 않은 딸아이가 "엄마 통화해도 돼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답을 보낼 여지도 없이 내가 먼저 전화를 했다. 목소리가 탁하고 잔기침을 하면서 전화를 받는다. '이것이 어디 아프구나' 이 세상 엄마들의 촉은 아무리 용한 점쟁이도 못 이긴다고 하는 우스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몸살이 났는데, 아무래도 저번부터 상태가 안 좋던 귀를 수술해야 할 것 같아"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단다.

몸이 허약하여 늘 걱정을 하게 하더니 의외로 집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취업,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출산하여 잘 살고 있다. 그런데 출산 당시 워낙 고통이 심하다 보니 귀의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이다. 피곤이 쌓이면 출산 후유증인 귀가 아프고 멍멍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본인의 의지와는 다르게 팀장 자리까지 오르면서 본인 업무뿐 아니라 팀원들, 상사까지 챙기고 육아까지 겹치다 보니 몸의 상태가 악화되었던 것이다. 자기 업무만 챙기며 근무하면서 육아에 더 신경 쓰고 싶었던 속셈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야근까지 하게 되다 보니 자기의 라이프스타일이 엉망이 되어버려 여유 없는 승진도 싫어 퇴직을 고려하고 있다. 싹싹하고 듬직한 사위뿐만 아니라 가까이에 살고 계시는 사돈내외분께서도 물심양면으로 돕고 있고 친정엄마인 내가 자주 돕지만 자기 성에 차지 않는 거지. 직장 생활을 하던 나는 딸의 연락이 오면 천리 먼 길 한양까지 토요일 새벽에 출발하여 일요일 늦은 시간에 내려와서 월요일 출근하곤 했다. 그래도 피곤한 줄을 몰랐다. 내가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는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귀여운 내 손주 보는 재미도 있고 더군다나 친정 엄마의 역할을 해주고 싶은 나의 작은 소망이었다.

나는 친정어머니께서 결혼 9년 만에 그것도 아들을 낳아서, 그야말로 방바닥에 한시라도 놓은 적 없이 안고 업고만 키웠다는 오빠와 유난히도 눈이 크고 하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나 이쁘다고 온 동네 소문난(예순나이 지금도 곱다.) 여동생 사이에서 자랐다.

유별나게도 아들이라고, 이쁜 막내라고 끼고 사시던 친정아버지였다. 아무 축에도 속하지 않던 샌드위치 중간 나는 일찍부터 눈칫밥을 먹고살아서인지 타인에게 간섭 안 하고 간섭받는 걸 싫어하는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왔다.

대학 입학금만 부모님께 받고 나머지 등록금과 생활비는 아이들 가르치는 알바를 하면서 충당하여 졸업을 하였고 첫 월급부터 결혼할 때까지 생활비를 제외하고는 다 저금을 하여 결혼 준비 자금도 마련하였다. 독립심이 강하여 무슨 일이든지 혼자 결정하고 혼자 잘 해내던 나는 지금도 남에게 싫은 부탁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훗날 친정아버지께서 이유불문하고 둘째인 나에게 그냥 미안하다고 하시고 돌아가셨다. 결혼을 하고 첫째인 딸을 낳고 산후조리를 친정 엄마가 해 주실 거라고 조금의 기대를 하긴 했었으나 남아선호사상이 극에 치달았던 친정아버지께서 친정 올케가 살림만 하고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친정 엄마는 친정 조카들의 뒷바라지해야 한다고 하시며 시어른들께 부탁하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어찌어찌 온갖 과정을 다 거치고 우리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던 시어른들하고 합가를 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같이 살았다.

나는 먼 훗날에 내 딸아이가 출산 바라지를 희망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해 줄 것이라고. 결심을 하고 또 했다. 나의 손길이 필요해서 부르면 망설임 없이 갔다. 더구나 정년퇴직을 한 지금은 남아도는 것이 시간인지라 여유 있게 도와주다가 내려온다. 가끔은 서울에서 내려오다가 친정을 스칠 때면 차를 졸음 쉼터에 세우고 한참 머뭇거리다 내려온다. 눈감고 생각한다. 이제 돌아가신 나의 엄마는 불러도 대답이 없다. 어찌 그리 큰 딸내미집에 오셔서 하루라도 놀다 주무시고 가셔도 되는데 친손주가 그렇게도 귀하셨나 싶다. 그래도 친정에 행사가 있거나 출장길에 나 혼자서 엄마 보러 들리면 두 팔 벌려 꾹 안아주시곤 했다. 보이지 않는 그 사랑을 나는 알기에 속 안 썩이려고 무덤덤하게 살았다. 지금 내 딸은 직장뿐만 아니라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나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한다. '부르면 달려가는 너의 엄마가 있기에 가능하겠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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