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것들의 이야기
(새것이 좋긴 하지만 )
[1984.01.23. 제자 일동]
여고에서 국어과 교사였던 남편의 학급 제자들이 결혼 기념으로 사 준 시계가 멈춘 것을 확인한 것은 그저께 아침 6시 50분 무렵이었다. 원래 새벽 4시 반이면 정확하게 눈을 뜨는 습관이 있던 내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이고 내가 못살아, 왜 벌써 깼을까?' 다시 잠깐 눈을 붙였다가 눈을 뜨고 티브이 뉴스 채널을 돌리고 보니 새벽 6시 48분이라고 나타났다. 벌떡 일어났다. 다시 벽시계를 보니 2시 45분 그대로였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는 휴대폰 시계를 보니 6시 50분이었다.
거의 39년을 고장 없이 우리 부부의 생활을 지켜보던 벽시계가 멈춘 것이다. 혹시나 건전지가 다 되었나 싶어서 새것으로 바꾸었다. 그런데도 꼼짝 안 하고 가만있었다. 툭 쳐도 시계는 가만있었다. 당황스러워 남편의 힘을 빌리려고 거실로 나가니 아무리 늦어도 7시면 어김없이 거실에서 네0버와 함께 독학으로 영어회화 공부를 하는 남편의 방문이 그날따라 닫혀 있었다. 혼자서 왔다 갔다 하는 아내의 소란을 못 들었을 리가 없는데 조용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여니 힘없는 목소리로 몸이 아프단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잘 안 아프던 남편이 시계 고장과 맞물려 아프다 하니 그 찰나의 순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앞서 갔지만 고개를 저었다. 온 전신이 아프다 하니 몸살인가 싶으면서도 직장 근무 시에도 결근 한 번 안 하던 양반이었는데 이제 백수가 무슨 몸살이야? 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자존심을 건드리기 싫었다.
애지중지하던 시계가 멈췄다고 말하는 순서가 아닐 정도로 심각하게 아픈 것 같아서 몸살감기약을 물과 함께 전하고는 심하면 응급실로 가자하니 알았단다. 아프긴 아픈 모양이었다. 이제 68을 바라보는 나이인지라 은근 걱정이 앞섰지만 다행히 약이 몸에 맞았는지 12시쯤 지나니 배고프다면서 거실로 나오기에 시계가 멈췄다며 보여주니 화들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하고 집을 몇 번이나 옮겼는데도 고장 없이 굳건히 우리와 함께 시간을 같이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은 시계를 선물한 그때 학급 제자들 소식을 가끔 들려주곤 했다. 우연인지 그 제자들이 나의 학부모가 되기도 했다.
문득 집안을 둘러보니 오래된 것들이 이 시계뿐만 아니다. 거실 한편에 서 있는 약간의 자주색깔을 가진 에어컨을 비롯하여 묵직한 원목으로 만든 식탁, 가끔 윙 소리 내지만 잘도 돌아가는 냉장고, 손주 녀석이 펄펄 뛰어서 약간 내려앉은 느낌의 베이지 색상의 소파는 거의 20년이 넘어서도 고장이 안 난다. 깔끔한 화이트 톤에 열효율성도 높다고 홍보가 되는 가전제품들을 우리가 어디 모르고 살겠는가? 약간 탁한 느낌마저 감도는 저기 거실 구석에 우아하게 서 있는 에어컨은 어른들하고 같이 살 때 처음으로 산 것인 데다가 찔 듯이 덥지 않으면 선풍기로 대신하기 때문에 일 년에 일주일 정도만 사용하므로 아직도 차가운 바람을 씽씽 뿜어낸다. 이 물건 제조 L회사에 연락하면 오래되어도 고장 안나는 자사품 홍보로 사용해도 될 것이라고 우리 식구들은 입을 모은다. 양문형이 처음 나왔을 때 산 냉장고는 어머님과 나의 손 때가 묻어 버리지 못하고 더구나 종갓집 맏이인 우리가 명절이나 조상들 기제사 때 많은 음식을 보관할 때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정말 튼튼한 원목으로 만든 식탁은 돈 없을 때 3개월 할부로 산 것이라서 나름대로 귀한 생각이 들어 하루에도 몇 번이나 닦으면서 사용하다 보니 조금은 사용감이 보여서 얼마 전 맞이한 며느리가 볼까 봐 위에 식탁보를 깔았더니 또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다. 6개월 전, 서울 사는 딸이 아파트 리모델링을 하고 결혼할 때 내 카드로 사 준 냉장고를 어디론가 보내고 다른 새 제품으로 턱 하니 부엌에 들여다 놓았다. 그걸 본 순간 "엄마가 사 준 냉장고 우쨌니?" 하니 지금 집의 전체적인 색감하고 안 맞아서 중고로 팔았단다. 뭐시라? 너무나 서운했지만 본인 살림인데 내가 간섭할 바는 아니지 싶어서 아무런 말도 안 했다. 그러고는 오히려 "엄마, 엄마집에도 오래된 거 이제 좀 바꾸세요." 했다. 돈만 주면 가져올 수 있는 새 물건이 좋은 줄 누가 모르나? 지난 일요일에는 오랜만에 새 아파트로 이사 간 여동생네 집으로 갔다. 당연히 새 아파트가 좋았다. 동생이 이사 가기 전, 언니 노릇한다고 우리 집 소파 바꿀 거라고 모아 둔 돈을 주면서 소파 새것으로 바꾸라고 했더니 아주 고급은 아니지만 동생네가 새로 바꾼 소파가 내 눈에는 멋져 보였다. 그날 저녁, 우리 집에 도착하여 휘 둘러보니 '아이고 오래된 물건이 많네'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내 손에는 벌써 마른행주가 들리어져 있었다. 도란도란 이야기가 담긴 내 물건을 소중하게 정성껏 닦으려고 앞치마도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