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툭! 내뱉는 말투를 들은 지 40년이 넘었지만 요즘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죽어라고 내 말은 안 듣고 자기 고집대로 하다가 결과는 나에게 잔소리를 듣는다. 오늘 또 하루 고집불통과 하루를 보냈다. 참아야지 하면서 말이다. 4월 4일 제주살이 4일 차, 목요일이다. 아침부터 버럭 하려다 그만두었다. 힘들지 싶어서 챙겨주는 공진단을 안 먹고 항상 잔소리를 해야만 먹는다. 차가운 얼음물을 마시지 마라고 했는데 숙소 냉장고 문을 여니 벌써 생수 한 병이 누워있다. 항상 몸이 차가운 남편이다. 그러면서도 집에서 한겨울에도 냉커피를 마시고 차가운 보리차물을 벌컥벌컥 마시더니 집을 나와서도 그런 행동이다. 진짜 뒤통수를 한 대 치고 싶다. 그리고 운전석 옆에 앉아서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많이 한다. 나도 운전 경력이 30년이 넘어서 알아서 잘하건만 안 해도 될 참견을 해댄다. 아우, 진짜 오늘도 인내지수가 폭발할 숫자였건만 참고 참았다. 우리는 둘 다 한번 계획해 두면 실천을 하는 성격인지라 오늘도 어김없이 차 시동을 걸었다.
오늘은 제주올레길 3코스를 걷기로 하였다. 천근만근인 몸이었지만 걸을 작정하고 온 제주라 오늘 하루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어제그저께 이틀 동안 점심을 굶어서 안 되겠다 싶어서 오늘은 점심도시락으로 감자, 두부, 양배추 샌드위치를 만들어 도시락에 넣었다. 아침밥맛이 없지 싶어 유부김칫국을 끓였다. 새벽형 인간 내가 딱 차려놓으니 늦게까지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고 늦게까지 잠을 안 자던 저녁형 인간 남편이 후루룩 맛있게 먹어주었다. 번개 같은 동작으로 준비를 마친 우리는 가랑비를 뚫고 어제 2코스 종점이자 3코스 시작점인
[온평리포구]로 향했다. 주차를 해두고 걸은 후 택시로 거꾸로 우리 차로 오기로 한 것이다. 3코스는 A, B가 있었다. [A코스]는 온평리 포구에서 표선해수욕장까지 약 20킬로이고 오름이 많고 소요시간은 7시간쯤이다. [B코스]는 총길이 14.6킬로이고 소요시간 5시간 정도이다. 남편은 나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가만히 눈치를 살펴보니 남편은 조금 힘들어도 A코스를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나는 힘들지 싶어서 쉬운 B코스를 희망한다고 했더니 의외로 그럼 B코스로 가자고 하였다. 연이틀을 무식하다고 할 정도로 걸었는데 또? 싶어서 나는 오늘은 바닷바람 마시며 느긋하게 걷고 싶었다. [B코스]로 결정한 후 주차장을 찾는데 없었다. 마침 옛날 등대 모양이 탑형상처럼 서 있던 근처를 살펴보니 주차를 해도 될 것 같아서 주차를 하니 또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했다. 참았다. 옷깃이 젖을 만큼 이슬비가 내렸으나 역시 하늘의 구름은 둥둥 떠가고 있어서 비가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옷 속으로 들어오는 바닷바람이 쌀쌀했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역시 걷는 체질인가 보다. 옆에서 남편을 슬그머니 바라보니 까칠한 모습이다. 수염도 안 밀어서 더욱더 할배 같았다. 내가 사준 새 모자는 안 쓰고 색 바랜 검은 모자를 쓴 뒷모습이 마오쩌둥 같다고 놀렸더니 화를 벌컥 냈다. 진짜 자유영혼이다. 조금 걸으니 검은 돌로 쌓은 환해장성이 나온다. 멀리 보이는 물빛이 먹물 같다. 간간히 파도가 와서 부딪힌다. 오묘한 자연의 모습을 보며 또 수많은 생각이 겹친다. 멀리서 보이던 예쁜 카페를 지나칠 수 없어서 들리니 단체손님이 가득하다. 커피를 좋아하는 남편을 보니 기분 좋아 보인다. 또 아이스커피다. 나는 고구마 라테를 마셨다. 창가에 앉아 창문 너머보이는 바다와 함께 찻잔을 두고 사진을 찍고 프로필 사진을 변경했다. 프로필 사진을 보고 우리가 제주에 온 것을 아는 몇몇 선후배가 연락을 해왔다. 오랜만에 이런 여유를 즐긴다. 옆에 앉은 남편이 접은 냅킨을 마이크인 양 갖다 대며 소감을 말하라고 한다. "아, 예. 바쁘게 달려온 우리 인생이었는데 이제 아들딸 결혼하여 잘 살고 있고 우리 둘 건강하고 앞으로도 이런 여유 즐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순간이 감사합니다." 그랬다. 그 순간 편안하고 좋았다. 굳이 행복이라는 단어를 썼어야 하나 싶다. 다시 일어나 걷다 보니 [중간 스탬프]를 찍도록 세워 둔
[신산리 마을 카페]가 보였다. 중간 인증 스탬프를 찍고 다시 힘차게 걸었다. 신풍포구를 지나니 A, B코스가 합치는 지점이라더니 다른 코스에서 온 일행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신풍신천바다목장]이 보였다.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10만 평의 규모라고 했다. 너른 평지 풀빛과 멀리 검푸른 바다의 물빛이 어우러져 한 폭의 대형 그림 같았다. 소 몇 마리가 여유롭게 누워 있다. 주인이 누굴까? 궁금했다. "아마도 억수로 돈 많은 부자이겠지?" 하니까 남편은 "그럼 당연하지. 우리는 아주 소시민이고" 그런다.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이 없어 폰을 앞에 두고 어깨동무를 하고 찍고 있으니 지나가던 단체 가이드님이 찍어준다. 사진 찍는 솜씨가 우수했다. 검은 돌사이로 바닷가를 걸으니 남편이 밀물 때라고 바닷물을 자세히 보라고 한다. 내 눈에는 못 느낄 정도였지만 자세히 보니 돌들이 물속에 잠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하천리 [배고픈 다리]가 나왔다. 한라산에서 흘러내려온 천미천이 바다로 연결된 강의 꼬리에 있는 다리라고 하였다. 비가 오지 않으면 바닥까지 마른다고 하였다. 단, 비가 오면 금세 넘쳐서 우회하여 걸어야 한다. [소금막 해변]을 지났다. 모두들 목표지점까지 가로질러가는 모습이 보였으나 우리는 정상 코스로 걸었다. 이윽고 [표선백사장]에 도착하니 모래밭이 장관이었다. 왼쪽으로는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오른쪽으로는 표선시내인데 사람들이 맨발 걷기를 하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로 걷다 보니 표선시내로 들어섰다.
제주민속촌이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그 뒤쪽으로 거대한 주차장이 보였고 우리는 종착지에 도착하여 제주올레 3코스 인증스탬프를 찍었다. 콜택시를 타고 우리 차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와서 A코스에 속해있던 미천굴로 달려갔다. 신생대 제4기에 생겨난 용암동굴로 길이가 1695미터라고 하였다. 어두컴컴한 내부로 들어서니 거의 경사가 없고 완만하였다. '천 가지 아름다움을 가져서 미천굴'이라고 하였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다시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갖가지 식물들의 크기나 아름다움이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거대한 선인장 식물원을 비롯하여 유명한 조각상들과 기이한 나무들을 구경하고 우리는 다시 숙소로 달려와서 푹 퍼졌다. 시간을 보니 오후 5시 15분,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서 한숨 자고 일어나니 6시 반이었다. 분리수거를 하고 저녁 밥상을 차렸다. 남편이 사진을 찍어주면서 굳이 그것을 나의 사진사니 어쩌고 하길래 그럼 나는 운전기사에 남편 전용 요리사냐? 했더니 아무런 말을 안 했다. 이번에는 내가 삐졌다. 조그만 행동을 하고 꼭 티를 내는 모습이 싫었다. 그래도 참아야지 고집불통 영감이랑 [제주한달살이]를 무사히 끝내고 가야지 싶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걸어준 다리에게 고맙다고 쓰다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