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도 어른이 될 수 있다.

예쁜 어른이 된다는 건

by 애양단

사무실로 가는 길이다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 온 피부와 땀구멍이 화알짝 늘어져 열리고 겨터파크 개장 직전이다

봄과 여름 사이, 미묘하게 여유롭고 또 무료한 이 출근길의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어

대열 피크민들과 연신 꽃송이를 심어 대며 중간중간 정수도 획득 중인데 그다지 신나진 않는다.


난 원래 나이답지 않은, 성별답지 않은 감수성 때문에 아주 조그마한 일에도 즐겁고 슬프기를 반복하지만

시간을 놓친 봄날, 따뜻한 봄기운이 느긋하게 깔린 오늘은 조울의 파도조차 찾아들지 않았다.

그저 봄볕 속에 한없이 풀어져 느긋하고 나른한 마음만 있을 뿐이다.


1570번, 나만큼이나 여유로운 광역버스에 오르고

내 오른쪽, 통로 건너편 자리에 연세 지긋한 할머님이 앉으셨다.

칠순을 갓 넘기셨으려나?

은은한 회색 톤온톤 캐시미어 패션에서는 예쁨과 기품과 단아함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할머님이 가방에서 꺼내 드는 것은 복잡해 보이는 악보 화일.

한눈에 봐도 하나의 악기를 위한 것이 아닌 적어도 삼 중주쯤 되어 보인다.

음악을 전공하시고 전문 오케스트라에서 은퇴하신 후, 지금은 아마추어 시니어 연주 그룹을 지도하며 소일거리로 삼으시는 분일 것이다. 아마 어딘가로 연습을 하러 가시는 길일 꺼라 확신했다.


나는 예전부터 출퇴근길, 특히 퇴근길이면 내 주변에 있는 낯선 사람 하나를 골라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소설 쓰길 즐겼다.

그 사람에게 어울릴 법한 서사를 나 나름대로 상상하며 슬퍼하기도 하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그렇게 조울거리면서 집에 까지 오던 버릇은 아직도 남아 이렇게 할머니를 바라보며 휴대폰 메모장을 열어 글을 쓰고 있다.


오늘도 예쁘게 늙으신 어른을 보고 또 나름 생각에 잠긴다.


예쁘게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예뻐져야 하고 또 어른이 되어야 하는, 두 가지를 모두 갖춰야 하는 어려운 일이다.

둘 다 쉽지 않고, 아니 대부분 이루지 못하는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일지 모른다.

예뻐지는 것이야 좀 더 신경 써서 관리하고 약간의 패션 감각만 더하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이것 역시 내 착각일 수 있지만^^)


진짜 문제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몇 해 전 보았던 어른 김장하라는 다큐멘터리가 문득 떠오른다.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주변 사람들을 보살피며 겸손하게 살아가시는 한약방 할아버지.

인생의 무게 때문이었는지 허리는 한없이 굽으셔서 앞을 보고 걸으시는 건지 땅을 보고 걸으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누가 뭐래도 그분은 어른이셨다.

그 어른 덕분에 흙수저 훌륭한 많은 인재들이 세상으로 나와 빛을 보았다.

난 죽었다 깨나도 이 분처럼은 될 수 없다는 걸 아주, 아주 잘 안다.

그럼 어른이 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걸까?


아직도 피크민들과 꽃을 심으며 출근하는 나는 너무 오랫동안 내 마음 한구석에 십 대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예전에는 동심 어린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는 것을 오십 중반이 되어서야 그것도 버스 안에서 깨닫는다.

동심 어린 어른은 없다.

철없는 어른은 없다.

동심이 남아 있어 겉으로 드러나 보이면 어른스럽지 않고, 어른으로 보이려면 동심은 꼭꼭 감추어 두고 말없이 인자함만을 풍겨야 하는데 그건 겉모습만 어른을 따라 해 보는 립스틱 마구 묻히고 빼닥구두 신고 나타난 유치원생이었던 내 딸내미나 다를 바가 없을 거다.


버스에서 내릴 때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한다.


남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말수를 줄이고, 상대를 배려하며, 성격의 모서리를 깎아 둥글게 만들고, 온화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동심을 감춘 나를 상상하며 네이버 지도에서 알려주는 안내 멘트를 따라 버스에서 내린다.


버스 타고 오는 도중 꽃은 얼마나 심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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