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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문 Mar 12. 2022

아이는 혼자 자라지 않는다

'소년심판'을 보고,

가해자에게 서사를 입혀 면죄부를 주었다면,  마음으로 안아주었더니 드라마틱하게 소년범이 갱생을 했다면, 정의는 결국 승리한다 가해자를 에 강력히 무릎 꿀릴 수 있었다면,

그렇고 그런 비현실적 드라마 한 편으로 느껴졌을지 모른다.


소년법이라는 양날의 검은 최선이라는 해결책을 만들어내기 어려워 보인다. 가해자가 미성년자 그것도 촉법소년의 연령까지 내려갈 경우, 피해자의 고통만을 두고 냉정하게 처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가 달라질 수 있다면 , 아직 어린 가해자를  한번 더 계도할 기회를 이대로 포기해도 되는 것일까?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 혹은 교화를 포기해서 더 나쁜 결과를 불러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같은 마음들이 강력 범죄를 저지른 소년범의 심판을 주저하게 만든다.


벽돌 투척 사건, 초등 살해 및 시신 훼손 유기 사건, 집단 성폭행 사건 뒤에 숨겨진 불법 성매매와 성착취까지, 소년심판은  실제 사회적으로 충격과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들 등장시킴으로써 매회 에피소드가 더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처벌해야 한다는 심 판사와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차 판사의 입장 대립은 우리가 소년범의 사건을 바라보며 가지는 두 가지 마음이기도 하다.


처럼 아이는 낳기만 하면 혼자 알아서 크는 걸까? 자기 밥숟가락을 입에 물고 나온다는 말이 맞는 걸까? 

작은 화분 하나를 키우는 데도 무수한 사랑과 정성이 필요하다. 사랑이 지나쳐서 물을 많이 주어도, 무관심해서 주지 않아도, 금방 죽어버린다. 죽어버린 화분을 방치해두면 공기를 해치고 벌레가 꼬이기 마련이다.

하물며 사람의 마음이 죽어버렸으니 오죽하겠는가. 어른이 죽어버린 아이의 마음을 방치하는 동안 그들은 어느새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이웃의 아이를 잔인하게 해하고, 친구의 약점을 악랄하게 이용하고, 자신과 주변을 망가뜨리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일은 그 모든 악행을 악이라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아직 성인이 되기도 전에.




범죄를 저지른 소년 뒤엔 불행한 가정이라는 안타까운 사연들이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다고 모두 범죄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심은석의 대사는 무척 공감이 되었다.

심은석은 죄는 소년이 저질렀지만 그 십자가의 무게는 보호자가 함께 짊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보호자는 소년을 제대로 인도하지 못해 사회적으로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어낸 죗값의 무거움을 함께 짊어져야 하고,  소년은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사람이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다른 이를 해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면서.


심은석은 철저하게 피해자 중심으로 사건을 바라보았다. 가해자는 처벌받고 피해자는 보호받아야 한다는 일관된 그녀의 신념이 가슴을 울렸다.

처벌이 답이 아니라며 가해자의 갱생과 인권을 외치는 목소리를 나는 이해하지 못한다. 죄 없이 희생된 피해자들은, 그 가족들은,  슬픔과 억울함과  무력함을 누구에게 호소해야 할까. 가해자의 상황이 아무리 불우하다 해도 살아있지 않은가. 목숨을 잃거나 2차 3차 피해로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수많은 피해자들은 무슨 죄길래 스스로의 감옥에 갇혀 평생을 고통받아야 할까.


 직접적인 가해만 가해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 모두 가해자일 수 있다는 심은석의 말에 숙연해졌다.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그러기에 그녀는 더 단호히 심판하고 더 끝까지 소년범을 주시하는 듯했다.

소년범을 혐오한다는 그녀의 말은, 그들이 더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하겠다는 의지로 느껴졌다.


아이는 어른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이 예쁘고 좋은 것만 볼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다. 적어도 아이가 내민 손을 못 본 척하는 어른은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는 어떤 어른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부끄럽지 않은 어른이라 당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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