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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문 Oct 24. 2021

저만큼, 아니 요만큼만

질투를 달래다

세상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은 부러운 사람이 없을까?

명성과 지위가 있으면 부러움이 사라질까?

예쁜 사람들은 외모에 대한 부러움은 없겠지?

나는 가져본 적이 없는 것들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는지 가끔 궁금해질 때가 있다. 


비교하는 삶은 불행하니 스스로 우뚝 서야 한다!! (누가 그걸 몰라서 비교를 할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세상, 재물을 부러워하지 말고 마음을 부유하게 만들어라!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데, 마음이 부유해질 수 있을까?)

종잣돈 얼마만 있으면 재테크를 하고 어찌어찌해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

(정작 그 종잣돈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예외에 대해서는 왜 설명해주지 않는 거야?)


외딴 무인도에서 혼자 살지 않는 이상,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비교라는 시스템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겨우 태어났을 뿐인데 , 나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키와 몸무게부터 아직 주름이 펴지지도 않은 얼굴까지 비교 대상이다. 걸음마를 언제 했는지, 엄마 아빠를 언제 처음 말했는지, 한글을 언제 떼었는지, 영어는 얼마나 하고 입학을 했는지, 기타 등등. 

입학 후엔 더 노골적인 비교가 시작된다. 비교할 수치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시험과 각종 검사 결과, 사소한 레벨 테스트까지... 우리는 왜 이렇게 피곤한 일들을 계속하는 걸까. 비교를 해야 내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걸까.




뇌과학자로 유명한 정재승 박사님의 열두 발자국이라는 책에 보면 효과적인 마케팅에 대한 내용이 있다. 

고가의 자동차를 소수의 고객에게 영업할 때 , 그 차가 고가라는 것을 차를 사지 않는 사람들도 인지하고 있어야 마케팅 효과가 높아진다고 한다. 내 차가 얼마나 비싼 차인지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남들이 알아봐 주어야 차를 산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남들이 다 드는, 디자인도 같은 명품백을 들고 싶어 하는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좋든 싫든, 남들보다 우월함을 느끼려면 '비교'라는 불편한 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가 없다. 기준이 있어야 내가 받은 점수가 고득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유치하다고 삐죽거리는 나도 종종 나도 모르는 혼자만의 비교를 하며 만족을 얻기도 한다. 과하지만 않으면 동기 부여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 비교이기도 하니 그렇게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경쟁으로 인해 학습 효과나 업무 성과가 높아지기도 하니 말이다.




문제는 그 질투하는 마음이 나를 잡아먹기 시작할 때이다. 질투에 끌려다니기 시작하면 삶은 온통 불만과 불행으로 가득해진다. 아무리 가져도 아무리 올라가도, 행복해질 수가 없다. 


고등학교 동기 중에 집이 꽤 부유한 친구가 있었다. 백화점에서 허걱 하는 가격이 붙어있던 옷들로만 입고 나오던 그 친구가 많이 부러웠고, 보세 옷도 고민하고 사야 하는 내가 초라했다. 

성격도 밝고 친절한 친구였는데 질투심이 커지니 이유 없이 그 친구가 싫어졌다. 그 친구를 질투하는 내가 못나서 싫었던 거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지나고 보니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나지만, 당시의 나는 세상에서 내가 가장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질투는 나를 많이 괴롭혔다. 엄마들은 왜 모이면 자식 자랑을 저렇게 하시면서 상처를 주실까 이해할 수 없었는데, 어느새 나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드러내 놓고 자랑은 하지 않아도 친구를 만나고 오면 아이의 부족한 면만 보게 되었고, 그런 내가 너무 싫었지만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가 학교 생활로 힘들어하면서 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 

친구 문제로 고등학교 3년 내내 힘들어하던 아이를 보면서 학교 생활만 제대로 할 수 있어도 감사하겠다고 매일매일 기도했다. 자퇴까지 고민하는 아이 앞에서 아이의 다친 마음 말고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아이는 힘은 들어도 학교 생활은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그날 이후로는 아무리 훌륭한 엄친아도 부럽지 않았다. 내 아이를 잃을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느껴봤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무사히 자라 주는 아이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 뛸 수 있는 보폭이 다르다.

아무리 뛰어도 저만큼 뛰어가는 친구를 따라잡을 수 없는데 숨을 헐떡거리며 쫓아갈 이유는 없다. 

저만큼 뛸 수 있는 친구는 저만큼 가도록 두고, 내가 뛸 수 있는 요만큼만 뛰어가면 된다. 

늦게 간다고 틀린 것도 아니고 빨리 간다고 맞는 것도 아니다. 빠르고 느린 기준 또한 내가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삶이란 오래 달리기와 같다. 내 페이스를 잃으면 주저앉게 된다. 

힘들면 쉬어가면 되지만, 내가 만들어놓은 기준에 갇혀서 다시 걸을 마음조차 먹을 수 없다면 억울하지 않은가. 

내 삶의 주자는 저만큼 가는 친구가 아니라 나이다. 행복은 불꽃놀이처럼 특별한 게 아니라고 한다. 어쩌면 불행하지 않은 삶이 행복이라고도 했다. 하늘에서 펑펑 터지는 불꽃은 없어도, 큰 아픔 없이 큰 시련 없이 조금은 지루한 일상들이 행복이 아닐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처럼 말이다.





행복한 나날이란
멋지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날들이 아니라
진주알이 하나하나 한 줄로 꿰어지듯이
소박하고 자잘한 기쁨들이
조용히 이어지는 날들인 것 같아요.

-빨강머리 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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