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단(淑旦)
요즘 저녁 식사 후 식곤증 때문에 9시 뉴스를 제대로 보기 어려운 상황이다. 한날은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소파에 반쯤 누운 채로 초저녁잠에 들어 ‘9시 뉴스’가 끝날 때쯤 깼다. 그날은 새벽까지 도통 잠이 오질 않아 이 시간에 무얼 하지 고민하던 중에 불현듯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그래 그곳에 한 번 가볼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새벽 2시인데, 남들이 알면 제정신이라고 할까. 아파트에 사는 텃밭 구성원이 내려다보면 어쩌나. 온갖 생각 다 들었지만, 그냥 한번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아침에 준 물이 뙤약볕에 다 말랐을까. 하루 사이 또 얼마나 자랐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텃밭 상황이 더 궁금해졌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평소보다 더 일찍 도착한 느낌이다.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 작물의 상황을 요리조리 살피고, 흙의 마른 정도에 따라 물의 양을 조절해 흡족하게 주었다. 이런 나의 행동이 정상이 아닌 사람으로 오해받기에 십상이지만, “농작물은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라고 했으니, 텃밭만은 내 마음을 잘 알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사는 곳은 농촌과 맞닿은 도시라 주변에 농지가 많다. 집에서 1킬로미터 이내에 어느 단체가 올해 처음으로 신청자를 받아 그 일부 농지를 텃밭용으로 제공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도 퇴직 후 무료한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겸 세 평정도 무상 분양을 받아 초보 농부가 되어 보기로 했다. 욕심이 너무 과해 나와 아내가 번갈아 심은 놓은 작물이 10가지나 되었다.
좁은 땅에 많은 작물을 심으려니 자연히 빽빽해졌다. 1차로 상추, 청경채, 쑥갓 등을 심고,, 2차로 파, 땅콩을 심었다. 이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채소는 단연 ‘상추’이다. 나는 쌈으로도 잘 먹지만 그냥 반찬으로도 잘 먹는다. 한 날 어머니께서 다른 데 가서는 “절대로 그렇게 많이 먹지 말라”라고 당부하기도 하셨다. 밥 다 먹고 나서 남은 상추를 먹으려고 하면 아내가 ‘이제 그만 드시라’라고 말린 것도 여러 번이다. 그럴 땐 ‘내가 소띠라 채소를 워낙 좋아해서 그런데 어쩌라’라고.
상추는 다른 채소에 비해 기르기 쉽고 적은 노력으로 수시로 수확할 수 있는 기쁨을 준다. 모종을 텃밭에 심고 일주일에 1~2번 정도 물을 주면 빠르면 일주일 늦어도 이 주일 내에 맛을 볼 수 있다. 나같이 부지런하지 않아도, 농사 지식이 없어도 키울 수 있는 게 상추다. 다른 작물들은 벌레 먹고 병충해 많아 농약 쳐주고 거름 주고 비료 주어야 하지만, 상추는 적당한 시기에 물만 흠뻑 주면 그걸로 끝이다.
주어진 환경에 잘 순응하는 성향이 어쩌면 나를 닮았는지 모른다. 평생 옷 투정, 반찬 투정, 물건 투정해 본 적이 없다.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땐 삼시세끼 밥 굶지 않은 것이 소원이었고, 결혼해서도 늘 빠듯한 생활로 솔직히 이런 투정을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솔직히 이런 투정 자체가 사치에 가깝다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 나에게 부모님은 늘 미안해하셨고, 아내는 종종 고맙다고 말했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분수에 맞게 살자는 게 내 삶의 철학이다.
텃밭을 가꾸고 난 후에 사람들과 대화거리가 많아졌다. 온통 텃밭 이야기다. 텃밭에선 멀칭은 어떻게 하느냐, 어떤 작물을 심어야 하느냐는 등 초보적인 질문부터 순을 언제쯤 따야 하느냐, 지주대를 어떻게 세워야 하느냐는 등 제법 농사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간다. 가정에선 부족했던 대화거리가 생겨나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이삼일에 한 번 상추와 같은 신선한 채소를 맛보는 즐거움도 누린다. 자연스럽게 소일거리도 생겨났다.
수확하는 날은 주방이 분주해지고 아내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무공해 신선 채소가 더해져 반찬 가짓수가 늘어 식탁이 비좁을 정도로 풍성했다. 내 마음도 그랬다. 상추는 자신을 저녁 재료로 내놓고 온 가족을 식탁으로 불러 모은다. 말수 적은 딸도 대화에 끼어들어 한 마디씩 툭툭 던진다. 입 짧은 아내도 음식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쓴다. 애교 많고 다정한 아들이 오랜만에 함께 해 웃음을 더한다. 행복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을 느낀다. 오늘 밤도 텃밭에 나가 볼 계획이다.
이러한 나의 상추 사랑은 단지 상추를 즐겨 먹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상추에서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배운다. 상추는 다른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그것이 고기든 생선이든 다른 채소든 아무 상관이 없다. 모두 감싸 안을 수 있는 대단한 포용력을 지녔다. 나도 상추의 포용력을 본받아 남을 배려하고 어려운 이웃을 끌어안는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작가님, 커피 한 잔에 글 쓰기 좋은 아침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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