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딘 사람은 그냥 도망쳐
손이 꿈틀거렸다. 슬글슬금, 조금씩 다가오는 게 내 손을 잡을 것만 같아. 안그랬으면 좋겠는데, 자꾸 신경쓰였다. 영화를 보다가 고개를 홱 돌리니 놀란 J가 얼떨결에 지 다리를 벅벅 긁는다. 부스럭거리는 게 거슬려, 영화 볼 때 팝콘조차 먹지 않는 나를 안다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도무지 몰입할 수가 없었다. 친구끼리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냉큼 잡아도 짜증 날 판에, 몇 차례 손이 주저주저했다. 키스하는 장면에서 방황하던 그의 손이 내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절묘한 순간에 다가온 축축한 그의 손이 이상하게 불쾌했다. 무안할까봐 다섯을 헤아리고 슬쩍 손을 뺐지만, 극장을 나오면서 나는 친구 하나를 잃었다.
K는 달랐다. 서툴렀지만,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어른처럼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도 했고, 나를 예뻐하는 마음이 자주 느껴졌다.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고 알아채 주었고, 영화 취향도 비슷해 이야기가 잘 통했다. 그와의 시간은 너무 짧아 아쉬움이 남곤 했다. 그는 시간을 쪼개고 또 쪼개 쓰는 바쁜 사람이었다. 매번 내가 그의 일정에 맞춰야 했고, 빠듯하게 짜인 그의 시간 속에 가까스로 나를 끼워 넣는 듯했다. 영화 도중에도 몇 번씩 시계를 들여다보며 집중하지 못하는 그에게 짜증났다. 그 순간, 덮고 있던 자켓 사이로 그의 손이 훅 들어왔다. 묘한 힘이 느껴졌다. 그런데 얼굴은 정면만 보고 있었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앞만 응시한 채로. 비겁해 보여 가차없이 손을 뺐다. 우린 그렇게 끝났다.
S와 영화를 봤다. 며칠 전 봤던 영화인데, 나답지 못하게 못 본척 하며 어색하게 연기하고 있었다. 덕분에 멜로도 아닌 SF영화를 두 번이나 보게 되었다. 매일 오던 극장인데 유난히 좁게 느껴졌다. 조금만 움직여도 그의 어깨가 닿았다. 거친 숨소리가 어깨로 전해질까 겁나 몰입이 되지 않았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갑자기 그가 나를 바라봤다. 창피해서 얼굴이 벌개졌는데, 깜깜해서 다행이었다. 그가 잠시 바라보더니 지긋이 웃었다. 그리고 그의 커다란 손이 내손을 감쌌다. 난 꼼짝할 수 없었다. 아니, 꼼짝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뜬금없지만, 어쩌면 이 사람과 결혼할지도 모른다고.
도대체 왜 그랬을까? 영화만 보면 사달이 났다. 정확히 말하면 극장에서 손이 문제였다. 어둠속에서 손을 잡는게 싫었다. 하지만 S가 손을 잡았을때, 숨도 아껴 쉬고 있었으니 이쯤이면 내 마음이 문제였던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손을 잡는다는 건, 같은 속도로 걸어가겠다는 약속이라 생각했었다. 내 속도는 느렸고, 나보다 빨리 달려오면 달려드는 것 같아 뒷걸음쳤다. 머뭇거렸고, 버거워 도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S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생각했다. 같은 속도로 걸어가도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부지런히 쫓아가면 괜찮을거라고.
우리는 지금도 매일같이 손을 잡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