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지나간 뒤

태풍이 지나간 뒤

by 벼리


사진 전시회에 갔다. 사람은 많지 않았다. 천천히 사진을 보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지난 봄 초입, 지리산 산불이 지나가고 난 후의 사진이다. 비스듬한 산비탈에 검게 탄 흙, 잘린 나무의 검은 그루터기, 부서진 검은 돌, 어수선하게 굴러다니는 꺾인 대나무, 산불이 끝났다고 말하기는 이른 그곳, 중심에서 조금 비껴난 자리에 작은 죽순이 그을린 상처를 지닌 채 새순을 올리고 있다.


나는 초록의 새순보다 어둠 속에 붙잡혀 있는 황폐함에 마음이 갔다. 산불의 피해는 어둠으로 남아있고, 죽순은 그 어둠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조용히 증명했다. 죽순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지만 주변에 사라진 것이 너무 많아 특별했다.


사진 앞에 서서 나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을 떠올렸다. 산의 푸른 나무와 그늘, 바람, 매해 어김없이 오던 봄의 전령들, 말없이 곁에 있던 시간들, 그것들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생각을 했다.


상처가 지나간 뒤의 풍경은 어딘가 서로 닮아 있다. 사진 속 산도 그렇다. 검게 남은 비탈에 죽순은 어둠을 밀어내지 못한 채 서 있다. 그 작은 초록이 어둠을 밀어내려면 몇 번의 계절을 이겨내야 한다. 상실을 겪고 나서야 ‘있었다’는 사실이 더 또렷해 보였다. 상처를 입은 뒤의 침묵이 예전과 다른 이유였다.

작가의 이전글남겨진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