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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 Feb 27. 2023

두 개의 구례

정지아,아버지의 해방일지

  두 개의 구례(2023.03.01)

정지아의 소설 <아버지 해방일지>는 10.19 여순사건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아버지와 그 가족의 고통과 좌절을 담은 이야기다. 이야기는 장례식이 치러지는 3일 동안 아버지를 조문 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통해 빨치산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딸의 심경 변화를 그리고 있다.

  소설 속에서 생각문장 하나를 뽑았다.


  “저 질이 암만혀끝나들 않해야.”


  ‘길’은 ‘선’으로 보이지만 무수히 많은 ‘점’들의 집합이다. ‘길’을 우리 삶에 비유하면 ‘점’은 삶의 한 부분이다. 삶은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시간이 선이라면 공간은 면이다. 이런 의미에서 작은아버지의 ‘저 질’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포함하는 ‘움직이는 공간’이다. 즉 ‘저 질’은 작은아버지의 삶이 있는 구례를 의미한다. 그곳은 빨치산 활동을 한 형에 대한 원망과 분노, 자기 때문에 토별대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이 있는 곳, 벗어날 수 없는 빨갱이 동생이라는 무거운 족쇄가 채워진 곳이다. 작은아버지는 그 족쇄를 벗어버리려 시도를 여러 번 하지만 결국 구례로 되돌아서야 했다.

 

  작은아버지와 달리 아버지의 구례는 철학을 구현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곳은 한겨레를 읽는 아버지와 조선일보를 보는 박선생이 함께 사는 곳, 친일파 고씨 집안을 용서해 준 곳, 아버지 자신을 감시하던 경찰과 허물없이 농을 주고 받는 공간이었다. 또 갈 곳 없는 빨치산 아버지를 품어 준 곳이며, 가난한 이와 공감과 연민을 나누는 곳이며, 사람의 실수를 용서와 자비로 베푸는 곳이었다. 아버지의 구례는 “사람이라 그래, 사람이라 실수할 수 있지”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가 발현되는 곳이었다.


  작은아버지나 아버지처럼 사람들에게는 자신만의 일생 서사가 있다. 작은아버지처럼 자신이 만든 족쇄든 타인에 의해 채워진 족쇄든 풀지 못한 채 일생을 보내는 사람이 있다. 누구 또는 어떤 족쇄가 더 단단한지 저울에 올리기보다 자신의 족쇄를 통해 어느 만큼 성찰의 시간을 보냈는지가 더 중요하다.


버지는 유물론의 핵심 가치인 계급 없는 평등한 세상이라는 꿈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유물론에는 선한 인간에 대한 믿음이 깔려있다. 아버지가 가진 선한 인간에 대한 신념은 연민이나 자비라는 숭고한 정신으로 나타났다. 이 신념이 구례 사람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향하게 했다.


  결국 족쇄를 풀 수 있는 길은 자기 자신이며 깊은 성찰로 승화라는 단계가 요구된다. 같은 시공간을 보내도 각자 다른 경험을 하게 된다. 그중 어떤 경험은 족쇄가 된다. 하지만 그 족쇄를 풀고 해방일지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소수다. 구례라는 고해의 세상에서 누구는 일생 족쇄를 차고, 누구는 해방된 세상을 살아간다.


   인간의 시간은 제한적이다. 나는 어떤 세상으로 채워갈 것인가. 그 선택은 분명하지만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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