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랏 하르브 광장의 야쿠비안 빌딩과 카페 리쉬 이야기
카이로 다운타운에 가면 묘한 기시감이 든다.
과거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 20년전, 30년전의 사람들이, 아니 더 그 이전의 사람들이 골목 끝에서 나올것만 같다. 까슬까슬하게 과거가 만져지는 것 같이 느껴지는 이곳, 카이로 다운타운이다.
유럽의 감성과 중동의 정서가 묘하게 섞인 이곳은, 사실 이집트를 프랑스 파리처럼 만들고 싶었던 군주 이스마일 파샤(재위: 1863-1879) 의 대규모 근대화 프로젝트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에 다녀와서 파리와 사랑에 빠졌다. 그래서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펼쳐지는 도로를 설계했고, 바깥으로 돌출된 테라스, 화려한 장식이 더해진 외벽, 아치형 창문을 갖춘 건물들이 그의 야망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런 도시 배경 설명을 듣고, 유럽을 상상하며 다운타운을 가면 매우 당황스러울 수 있음을 주의하시길.
이곳은 바로 카이로에서 가장 복잡하고 활기찬(?) 곳 중의 한군데 이기 때문이다. 고풍스러운 건물의 외관과 어울리지 않게 '최신유행'을 뽐내고 있는 1층 상점의 마네킹들, 밝기만 한 조명과 시끌벅적한 상인들의 말소리, 자동차의 경적소리와 인파로 가득한 지금 이 곳은 유럽에서 느끼는 정서와는 또 다르게 마음이 가고 정스럽긴 하다.
지난 화에 소개했던 따흐릴 광장에서 한 블럭을 걸어내려오면 탈랏 하르브 광장이 나온다. 카이로 다운타운을 아랍어로 하면 وَسَط الْبَلَد(Wast Al-Balad, ‘도시의 중심’)이라고 하는데, 그 중심 중에서도 또 중심이 되는 곳이 따흐릴 광장과 딸랏 하르브 광장이다
이 지역은 오랜 시간 동안 이집트의 정치·사회·문화적 변화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식민지 시절에는 영국인들이 드나들던 고급 주거지이자 상업 중심지였고,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주도한 이집트 혁명 이후에는 새로운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이 유입되면서 공간의 성격이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문학과 영화 속에도 잘 반영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과 영화들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야쿠비안 빌딩》.
소설 《야쿠비안 빌딩》은 이집트 현대사의 변화와 함께 사회 문제를 밀도 있게 그려낸 작품으로, 30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한국에서도 소개된 바 있다.소설의 무대인 야쿠비안 빌딩은 실제로 카이로 다운타운에 존재하는 건물로, 원래는 이집트 상류층과 외국인 거주자들이 살던 공간이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옥상에 거주지가 형성되어 다양한 계층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도 사회 변화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한때 화려한 상류층 생활을 누렸으나, 지금은 젊은 여성들을 탐하며 자신의 청춘을 그리워하는 노인 자키 베, 어렸을 때부터 동성애를 경험했지만 보수적인 사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야 했던 언론인 하팀 라쉬드, 부패한 정치권과 결탁한 권력층 핫즈 앗잠, 경찰이 되지 못하고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된 타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성적 착취도 감당해야 하는 젊은 여성 부사나 등.
소설은 이들이 서로 얽히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통해 이집트 사회의 다층적 모습을 정교하게 그려냈다.
나는 이집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소설을 읽었다. 처음에는 이곳 사람들이 친절하고 장난기 있지만 종교적이고 보수적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소설을 읽고 나서야, 내가 이집트 사회를 표면적으로만 알고 있었구나 하는 마음에 머쓱해졌다.
소설이 발간된 지 20년이 더 지난 지금, 그 속에서 제기된 문제들이 이제는 피부로 느껴진다. 그만큼 내가 이곳에 익숙해진 것인지, 아니면 이집트 사회 문제가 더 심화 되었는지 모르겠다.
한편, 소설의 배경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설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어 소설 자체인것 같은 카페도 있다.
바로 카페 리쉬(Café Riche).
탈랏 하르브 광장 바로 옆에 위치한 이 카페는 단순한 커피숍이 아니다. 영국 식민지 시절 → 왕정 시대 → 나세르의 사회주의 혁명 → 공화국 체제로 이어지는 이집트 현대사를 모두 목격한 역사적인 공간이다.
초기에는 정치인, 예술가, 음악가들이 모였던 곳으로, 이집트의 국민가수 '움 쿨숨'이 공연을 하고, 킹 파룩이 관람을 했다는 이야기, 가말 압델 나스르 대통령과 자유장교단들이 만남을 가진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제는 관광객과 현지인들이 함께 어우러지는 평범한 카페처럼 보인다. 아니 낡고 오래된 카페처럼 보인다. 하지만 창문과 벽에 걸린 낡은 사진들, 낡은 샹들리에를 보고 있으면, 이곳이 그저 커피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100년이 넘게 역사를 목도해온 장소임이 실감이 난다.
다운타운을 걸을 때마다, 상상력이 발휘된다.
과거가 현재의 나에게 말을 거는 느낌이 드는 건, 이집트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이지만, 다운타운은 특히 우리가 흔히 관심갖는 고대 이집트가 아니라, 현대사가 깃든 곳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이스마일 파샤의 근대화 야망, 식민지 시대의 외국 문물의 흔적, 나세르의 혁명, 그리고 아랍의 봄까지—이곳에는 이집트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켜켜이 쌓여 있다.
화려했던 상류층의 흔적 위로 혼잡한 거리와 대중문화가 뒤섞이고, 정치적 변화의 중심이었던 광장들은 여전히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진다.
지금 이집트에서 살고 있는 나는 또 어떤 이야기의 한부분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 끝없는 이야기들이, 조금 더 아름답고 따뜻한 방향으로 흐르기를 바라며 나는 이곳을 기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