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메이트(5)

ㅡ 그 친구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by 민교

창선동에서 시작한 양재반은 대연동에서 마쳤다.


일주일에 1번, 4 개월 코스였다. 저녁반은 목요일 7시였는데, 의외로 결석하는 사람이 많았다. 양재반에 들어오기가 쉽지 않았지만, 여성회관이 대연동으로 이사를 하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래(?) 쯤 되는 아가씨는, 창선동에서 등록할 땐 있었는데, 대연동에서 수업을 하고부터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나이도 몰랐는데, 양재수업 끝나기 3주 전인가부터 계속 보였다.


어떻게 해졌는지는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양재반이 끝날쯤에 남포동에서 만났다. 우리는 동갑이었, 대학교 4학년이라고 했다. 졸업을 앞두고 정리할 게 많아서 대연동에서 수업을 받기가 힘들었다고 했는데, 집이 영도라 부산역에서 버스를 갈아탄다면서 부산역에서 내렸다.


의외로 둘이 잘 맞서 친구를 하기로 했는데, 전공이 수학이라고 해서 좀 놀랐다. 나는 수학 점수가 제일 낮았는데, 수학교사를 꿈꾸다니.

다음 해, 경남 소도시에서 수학교사가 되었다.

사실 그 친구와 더 가까워진 것은 내가 친구에게

준 조그만 도움이다. 나는 별 게 아니지만, 친구는 나의 도움이 컸었다며, 시간이 나는 토요일에는

꼭 연락을 했다.


나는 양재학원에서 배운 대로 내 멋대로 옷을 만들어 입었지만, 친구는 양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미용이면 모를까, 양재는' 하던 친구의 표정이 생각난다. 친구는 자신의 과에 3학년에 편입한 두 살 많은 언니가 자신을 되게 예뻐한다고 했다. 학교를 졸업하면 미국으로 갈 건데, 친구도 같이 가자고 한다는 것이다. 그 언니는 이름난 양재학원과 미용전문 학원을 다닌다면서.


친구는 경남 소도시 교사 생활이 힘들다고 했다. 잦은 주말 당직에다 월급도 생각보다 적다면서. 그러나 어쩌겠는가. 친구가 부산에 오려면 임용고시를 쳐야 하는데, 그게 그리 쉬운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시간은 잘 흘러갔고, 우리는 틈만 나면 돌아다녔다. 친구가 있는 곳에도 가고, 웬만큼의 경남 지역과 울산 전역을 헤매기도 하고, 등산도 가면서.


놀러 다니는데 재미를 붙인 우리는 나이는 잊고 있었다. 미국에 갔던 같은 과 언니가 결혼을 하러 오면서, 두 살이 적은 남동생을 소개했다고 한다. 두 살 많은 줄 알았던 언니는 네 살이 많았고, 미국에서는 나의 친구를 집안에서 신붓감으로 점찍어 놓았다니, 참, 참이었다. 그때 결혼시장에서 고등학교 선생님의 인기는 대단했는데 말이다.


친구가 그랬다. 그 언니의 집은 영도의 집 근처인 데다, 같은 실향민의 딸이라 통하는 게 많다고. 아니, 나의 친구가 고등학교 교사라는 직업에도 다소곳하지 않아서 한국에서는 그렇게 인기 있는 신붓감은 아니란 것을. 맞는 말었다.

친구는 교사 생활이 5년쯤 되었을 때, 청출어람을 기대했다. 자신이 하고 싶었던 언론계로 진출할 학생이 없다고 아쉬워면서. 그러나 친구가 근무하는 학교는 여고인 데다, 여자 수학선생님은 이미 멋짐 자체였다. 우리는 더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本을 보여야 된다며, 修身을 강조했다.


시계는 잠깐도 멈추지 않았다. 친구의 어머니는 혹 딸이 미국으로 시집을 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지 만, 서른을 넘기고 있었다. 그 서른이 뭔지! 직이라고 집으로 놀러 오라는 전화가 왔었다. 친구는, 미국에서 보낸 로션이며, 샴푸며, 컵에 걸어놓는 드립커피 등 온갖 것들을 꺼내 놓았다. 사진도 함께. 몇 번 본 그 언니의 윤곽이 있었다.

큰 시누이가 될 언니가 미국에 사는데, 남편이 될 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에 가서 10년이 지났다고 했다.


나는 정말 좋은 친구가 미국으로 갈 거라는 생각을 굳힌 듯해서, 집에 올 때 기운이 쭉 빠졌다.

그래, 친구가 조그만 소도시의 교사보다는 새로운

세상에서 뜻을 펼치는 게 백번 낫다고 머리로는 받아들면서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서른 하나가 된 친구는 결혼을 했다. 활짝 웃는 친구는 행복해 보였다. 신혼여행이 끝나고 친구의 남편은 미국에서 나머지 공부를 마쳐야 했고, 친구는 미국으로 갈 준비를 했다. 결혼 전과 달리 자주 만나지 못했고, 친구는 딸을 낳았다. 그리고 딸이 돌즈음에 미국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공항에 갈 수 없었다. 前 직장을 퇴직했었고, 나도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쳤었다. 미국에 가고 나서 몇 달 뒤에 편지가 왔었다. 거기는 메릴랜드주 볼티모어라고 했다. 친구의 집이 있던 영도 흰여울 마을과 비슷한구도시로 경치가 정말 다면서 놀러 오라고 몇 번을 강조했었다.


시간은 쉼 없이 흘렀어도, 친구를 잊지는 않았다. 시차도 있었고, 거리도 멀었고, 형편은 더더욱 안 되었다. 그러다 나도 결혼을 했다. 둘째를 낳은 지, 일주일 되는 날에, 그 친구가 친정에서 전화번호를 알았다면서 전화가 왔다.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는 바로 눈물이 핑 돌았지만, 갈 수 없었다.

두루 챙긴다고 미국으로 가기 전에 한 전화였는데, 신생아에다 18개월 첫째는 엄마랑 한시도 떨어지 질 않았다. 친구는 세 아이의 엄마였고, 직장에 다닌다고 했다. 세 아이의 엄마로 마흔이 다 된 워킹맘의 외국살이는 또 얼마나 고될까를 생각하니 먹먹했다. 친구는 현명하게 잘 헤쳐나갔으리라. 누구든 서른의 날들은 자신의 둥지를 만드는 시기라 친구는 가슴 한 켠으로 밀쳐놓는 시기다.


몇 달 후,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했었다. 시차가 다른 국제전화는 불친절했고, 친구는 새로운 직장을 찾는다고 했는데, 이후로 이어지지 않았다.



안다. 물 설고, 낯선 곳에서 중년을 보내고

또 노년을 맞았을 친구는 어떤 모습일까.

짐작이지만, 누구보다 멋진 노년으로 살 거라고 믿는다. 친구의 환한 웃음은 모든 걸 가능하게

했을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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