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매운맛을 알게 한 그녀
지금 이름이어도 세련된 이름의 그녀는,
나보다 두 살이 많았다.
스물넷의 나는 토요일에 보수동에 있던 한국아동복지회에서 볼런티어 활동을 했다. 한국아동복지회는 국내 최초로 민간인이 만든 사회복지시설이다. 자원봉사자라는 말이 쓰이기 전인 80년대 초반이라, 볼런티어로 불렀다.
토요일에 퇴근을 하고 보수동 복지회 사무소로 가면서 '어떤 일이 있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자원봉사 점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관에서도 우리를 혹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했었다.
두 살이 많았던 그녀는 키가 크고 누구에게나 웃는 사람이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지만, 송도의 구호병원에서 볼런티어 활동을 하고 오다가 버스가 남포동에 닿자, 커피를 마시자고 했다. 볼런티어 활동을 하러 오는 사람은 그녀와 같은 나이의 남자와 중간관리자 급인 나보다 열 살이 많은 언니와 간간이 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와 나는 서로 敬語를 쓰며 친해졌다.
그녀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은 안 다닌다고 했다. 집은 해운대쪽이라 우리 집과는 아주 멀었지만, 나는 20대 아닌가. 가야 할 곳이고 만날 사람이라 멀든, 지하철 공사로 버스에서 하세월이던 갔다. 그녀는 남동생이 셋이나 되는 외동딸에, 어머니는 국민학교 선생님을 조기퇴직 하셨고,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다. 우리 집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부모님과 집안에 주눅 들었지만, 부모님은 나를 작은 딸이라 불렀다.
그녀는 원하는 미술대학에 떨어지고 대학을 안 갔다면서, 직장에 다니는 내가 자유로워서 부럽다고 했다.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환경을
부러워하는 건지, 나는 그녀가 '존재 자체만으로
존중받는' 것이 부러운 데 말이다. 아무튼 그녀와 나는 못 간 미술대학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가까워졌다. 집에는 이모가 보던 인테리어 잡지가 많았고, 결혼하면 집을 인테리어 잡지처럼 꾸미고 싶어 했다. 마침 집이 아파트라서 더 가능해 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사 출신이라 그런지, 살림솜씨도 남달랐다. 밥을 차려주시며, 김치를 가위로 싹둑 잘랐다. 파란 테두리가 있는 하얀 접시에 담긴 김치는 먹음직한 색다른 요리였다. 지금은 김치를 가위로 자르는 걸 당연하게 여기지만, 80년대 초에는 낯설었다.
나는 그녀의 집안 분위기와 어머니가 좋아서 그녀의 집에 자주 갔었다.
그녀와 여름휴가를 갔다. 그녀의 부모님은 여자 둘만 가는 걸 조금 꺼렸지만, 우리는 부산과 다른 곳에 간다는 기대가 컸다. 버스를 오래 타지만 한 번에 갈 수 있었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마을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우리가 갈 곳은 경남 남해군 남면 홍현리, 다랭이 마을. 숙소도 그 마을 태생의 자매가 자신들의 집으로 꼭 가라고, 정말 좋은 곳이라고 추천한 곳이었다.
그 자매는 부산에서 직장을 다녔다. 나의 언니와 같은 직장에 다녔는데, 자신들의 고향 마을에 실망하지 않을 거라고 자랑을 했다. 그곳은 정말 멋지고 좋은 곳이었다. 우리는 부산 출신인 데다,
몇 년씩 이어지는 지하철 공사가 지긋지긋했다. 거기다 그녀가 사는 곳은 그때 시내라 불리던 남포동과는 많이 먼 곳이었다. 남포동 가까이 있는 보수동을 오가기도 얼마나 불편했을까.
오래 버스를 타고 남해에 갔다. 남해 시외버스터미 널에 도착하자, 그녀가
"엉덩이가 아파서 더 못 가겠다."
라고 해서, 우리는 깔깔 웃었다. 이제 남면 홍현리, 다랭이 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부산에서 가져간 빵을 먹고 있는데, 버스가 와서 우리를 태웠다. 경사진 언덕에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버스는 멋진 경치와 엉덩이 아픔을 함께 주었다. 한참을 달려 버스가 멈춘 곳에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스듬한 언덕 아래에서 바다는 잔잔하고 하얗게 반짝였다. 다랭이 논은 손바닥 만한 땅도 놀리지 않겠다는 의지인지, 크고 작은 소쿠리를 엎어놓고 초록의 길쭉한 것을 꽂은 듯 벼가 자라고 있었다. 버스를 타려고 급하게 먹은 빵으로 목이 메어서 바닷물을 바로 퍼 마시고 싶을 만큼 물이 맑았다. 배가 멀리에 있어, 그림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었다. 다른 곳의 사람들은 남해하면 다랭이 논을 떠올릴 만큼 경치가 좋았지만, 그곳의 생활은 녹록해 보이지는 않았다.
자매들의 방 커다란 창문으로 쉼 없이 파도가 머물 다 갔다. 잠은 오지 않았고, 할 이야기는 많았다. 우리는 환경이 많이 달랐지만, 20대라 결혼이란 숙제가 있었다. 여러 번 맞선을 봤다는 이야기를 했고, 부모님과 생각이 달라서 갈등을 겪는다고 했다. 그러다 희붐하게 밝아오는 아침을 맞았다. 밥을 먹고 바로 오려고 했는데, 그곳의 부모님이 힘들게 왔으니까 하루 더 있다 가라고 하신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일을 돕자고 했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서툴렀다.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해드리고 다음날 부산으로 왔다. 그녀와 나는 그날 이후 더 친해졌고, 새해를 맞았다.
그녀가 선을 본 사람과 결혼을 했다. 무역회사에 다니는, 선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신혼집은 아파트였는데, 시댁에서 마련해 준 거라고 했다. 그녀는 신혼집을 예쁘게 꾸몄고, 두 딸의 엄마가 되었다. 간간이 연락을 하고 만났지만, 관심사가 달랐다. 나도 학교에 다닌다고 연락이 뜸해졌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다급한 목소리로 그녀가 토요 일에 만나자는 전화를 했다. 남포동 어느 밥집에서 만난 그녀는 예전의 잘 웃던 사람이 아니었다.
두 딸을 키우기에 지친 아낙의 모습이었다.
그간의 안부를 묻고는 뜸을 들이다가
"10만 원만 빌려주세요."
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한참 말없이 앉아 있다가
"나는 돈거래를 하면 친구도 잃고 돈도 잃는다는
말이 맞다고 생각해요. ○○씨가 참 좋은 친구였는데, 그걸 깨기가 싫어요."
라고 하자
"아줌마들은 돈이 급하면 서로 빌려주기도 해요."
라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아줌마도 아니고 연락도 뜸했던 데다, 돈거래는 정말 싫었다.
그녀는 남편이 결혼할 때 시부모가 해주신 집도 대출을 많이 받았더라면서 울먹였다. 지금 돈을
빌려달라고 한 것은 급하게 카드값을 갚아야 한다는데, 나는 난감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눈이 마주쳤는데, 정말 급한 마음이
읽혔다. 직장에서 익히 봤던 일이라, 10만 원을 빌려주었다.
한 달 뒤에 갚기로 한 10만 원이었다. 갚기로 한
날짜가 되었지만 전화가 없었다. 몇 번의 전화 끝에 연결이 되었는데, 돈을 갚겠다는 말은 없었다.
"내가 분명히 말했죠. 돈도 잃고 친구도 잃기 싫다고.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하면 안 되죠."
그 말에 그녀는 뭔지 모를 짜증을 내었다. 만나기로 한 토요일, 그녀는 전화도 없이 한 시간을 늦게 왔다. 돈을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이 주머니, 저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때 엄마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돈은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 거다."
일단 돈은 받아야 했다. 아무 말은 안 했지만, 버스를 타고 오면서 돈을 가지런히 해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늦었던 시간이 돈을 구했던 시간인지 묻지는 않았다.
"10 만원 잘 받았어요. 챙겨줘서 고마워요."
라면서 나에겐지, 그녀에겐지 모를 인사를 했다.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가 커피값을 계산했다. 그녀는 나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인사도 없이.
그리고 해가 바뀌고 나는 퇴직을 했다. 휴대전화가 없었던 그때, 나의 퇴직은 단절이었다. 시간이 지나 고 그녀의 집에 전화를 했었는데, 번호가 바뀌었다. 이사를 한 것이다.
쉰아홉, 예순을 맞기 전에 여행을 다니며 좋았던 곳을 한 번 가보고 싶었다. 그녀와 그 마을이 생각나서 남해 다랭이 마을에 혼자 갔다.
35년 만에 간 다랭이 마을은, 길도, 사람도, 집도
다 바뀐 경사진 길에 알록달록한 숙소들만 낯선 여행객을 부르고 있었다.
나의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돈거래는, 아주 매운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