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때론 체칠리아처럼
철학자 마틴 부버는 일상의 신학에서
"너의 日常이 초라하다고 탓하지 말라.
풍요를 불러낼 만한 힘이 없음을 탓하라."
고 했다.
우리는 매일 자신은 돌보지 않고 타인이 무엇을 어떻게 느끼고 사는지에 더 관심을 둔다.
그러다 2026년을 꼬지에 꽂힌 곶감처럼 빼먹고 어느새 넉 달을 흘려보냈다.
2026년 4월의 마지막 수요일, 모퉁이 극장에서 본 <비발디와 나>라는 영화는 울림이 컸다.
才能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천상과 나락을 두루 경험하게 하는지?
<비발디와 나>의 체칠리아를 보면서 생각난 영화는
네플릭스에서 본 <마더링 선데이>의 하녀 제인이다. 두 사람 다 삶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自由를 누리며 자신으로 살았다.
自身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힘듦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받아들인다는
쉽지 않은 선택이다. 두 주인공은 태어나서 바로 고아원에 버려진다.
1) 체칠리아 이야기
체칠리아는 '자비와 연민'이라는 피에타 수녀원에 버려지지만,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나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연주자로 살기를 원하지만,
폐쇄 수녀원의 고아원에서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자신의 의지로 살기는 어렵다.
연주를 할 때도 검은 가면을 쓰고 얼굴을 가려야 하지만, 체칠리아는 호기심이 많은 처녀다.
비밀장소에서 엄마는 어떤 사람이었으며,
왜 자신이 고아원에 버려졌는지 등을 일기 형식으로 편지를 쓴다. 그러다 음악감독이며 작곡가로 부임한 비발디 신부에게 비밀장소를 들켰지만, 타고난 음악적 재능과 기지로 신임을 얻는다.
그때 고아원을 후원하던 귀족이 후원을 조건으로 체칠리아를 탐내지만, 체칠리아는 남자 경험이 있어 귀족을 당황하게 한다. 모욕감을 느낀 귀족은
체칠리아에게 인사를 하러 왔다면서 체칠리아를 안심시키고는 몹쓸 복수를 한다. 체칠리아의 손가락을 부러뜨린 것이다. 음악을 잃고 삶의 의지도 잃었지만, 체칠리아는 고아원 부원장의 배려로 고아원을 떠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체칠리아는 음악의 도시 베네치아를 떠나지 않고 음악과는 무관한 삶을 살고 있다. 수상택시 격인 다인용 곤돌라를 타고 아침 출근길이다.
고아원에서 살 때는 정체성처럼 보이던 머릿수건을 풀고 어깨까지 늘어뜨린 머리로 자신을 위한 삶을 위해 곤돌라의 흔들림에 몸을 맡긴다. 곤돌라는 흔들림이다. 그 흔들림은 自由이며, 체칠리아의 새로운 정체성이다.
2) 제인 이야기
영화의 시작은 이름난 償을 받은 제인의 집에 많은 기자들이 취재하러 오는 것부터 시작되었나? 아닌가?
제인은 성공한 영국의 유명 작가다. 노년의 작가는
많은 상을 받았기에 새로운 상을 하나 더 받는다고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다만 어느 기자의 질문에 눈을 반짝인다.
"어떻게 작가의 길을 가게 됐나요?"
하는 물음을 곱씹어 본다.
그건 묻어놓은 아픔이면서 트라우마이며, 삶의 방향을 이끈 줄이었다. 그러면서 짧은 결혼 생활 중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남편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 것이다.
제인은 어떻게 作家가 되었을까?
첫 번째는 제인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진 것이었고,
세 번째는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아내인 제인을 두고 머나먼 길을 떠난 남편을 만난 것이며,
둘째는 남편에게 말하지 못한, 아니 끄집어내지도 못하는 충격과 절망과 세상의 단절이었다.
'마더링 데이'는 영국의 '어머니 날'이다.
제인이 한참 동안 세상을 등지게 한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제인은 고아였기에 살림을 도맡아 하는 하녀들에게 주어진 휴가인 '마더링 선데이'에도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오래전부터 관계를 이어온 연인이 전화를 한다. 부모가 모임을 간 뒤에 자전거를 타고 뒷문으로 오라고. 멋지게 차려입은 제인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풍경은 제인의 환희였지만, 그 순간은 짧다. 귀족의 셋째 아들로 철부지이지만, 제인의 재능을 알아보는 유일한 사람이다.
책장 가득한 책들을 마음껏 보고 오래 쉬고 가라면서 탁자에 음식을 올려둔다.
둘은 밀회를 즐기는데, 부모들의 모임 자리에는
약혼자가 늦어지는 남자를 기다린다.
전쟁으로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해야 하는 것도, 형의 여자였던 여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도 다
부인하고 싶기에 모임은 늦어진다.
제인을 집에 두고 모임에 가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제인은 도시로 떠나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그리곤 쓴다. 살기 위해서, 잊기 위해서
그때 만난 남자가 남편이었다. 제인은 재능을 알아주는 남편을 만나 뼈와 살을 발라 글을 쓴다. 제인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본 남편은
"어떻게 작가의 길을 가게 됐나요?"
하고 묻는다.
제인은 남편에게
"첫째는 고아로 버려진 것이고, 셋째는 당신을 만난 것이며, 둘째는~~~~~"
하고 호흡을 가다듬는다.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그 상처, 기억들을
되새기는 중에, 남편은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제인은 남편과 한 몸인 듯 그를 死地에서 끌어내려고 애쓰지만, 운명의 시간은 둘을 갈라놓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작가가 된
두 번째 사유는 회고록에서 밝혀진다.
죽음이 가깝지 않으면 기차와 부딪쳐 산산조각이 된 그 트라우마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자신을 알아보았던, 그러나 세상의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그 장벽 같은 신분 사회에서 제인은
속울음을 배웠었겠지.
3) 소설을 만들어 보다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도서관에 갔었다. 도서관에서 버스를 타고 집에 책을 두고 가면 되었지만, 극장에 바로 갔는데, 무거운 미술책으로 용두산공원도 걷질 못하고 왔다. 소파에 앉아 물을 마시다, 극장에서 가져온 <비발디와 나> 포스터가 무엇이든 적어보라고 했다.
나는 제인이 아니라 그분은 천천히 오셨고, 체칠리아를 닮질 못해서 영화의 엔딩 음악이 비발디의 사계 중 봄인지, 여름인지 헷갈렸다.
까만 화면을 메운 자막은 길었고, 귀에 선 음악은 오래 이어졌다. 그 장면이 떠오르며, 체칠리아가 매일 아침 곤돌라를 타고 흔들리다가 나중에 제인으로 환생했다고 믿고 싶었다.
그렇게 운명에 맞섰던 두 여인은 나의 체칠리아가 되어 한 편의 소설을 마무리 지었다.
가끔은 나에게도 번뜩이는 문장이 찾아오길 바라지만, 나의 일상은 빈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