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들이다

by 민교

♧ 미술관에서 만난 친구


육십이 넘어 미술관에서 만난 친구는 동갑이었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말과 느낌이 통해서 친구가 되자고 했다. 동갑이라 여러모로 편했지만, 나이가 나인만큼 약간의 탐색전은 필요했다. 만남이

일 년을 지나면서 둘의 지난 시간을 맞춰보니,

같은 도시에서 종으로 횡으로 어긋났으나, 보낸 시간은 퍼즐처럼 맞출 수 있었다.

열 번쯤 만났을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친구가

"누구랑 싸워본 적이 있나? 보니까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한다. 살면서 싸울 일을 만들지 않았다. 싸우지도 않았지만, 싸울 상대도 없었다. 그렇다고 결혼 생활 삼십 년 동안, 부처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내가 찬바람만 몰아치는 그런 집에 살지도 않았다. 한 세상 살아내자면 꼭 싸워야 하는 남편과는 정말 많이 싸웠다. 결과는 어땠냐고?

내가 압도적으로 이겼다. 십 센티 가량의

키 차이에도 남편은 나를 이길 수가 없다.



♧ 싸움이라기보다 잔소리(?)


그날은 싸웠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남편이 당한 날이다. 쪼끄만 여자가 기다란 남편을 암팡지게 구석으로 몰아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만있으면

다음 공부에도 지장을 줄 것 같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런 것이 남편은 일주일 내내 술을 마시고 온 데다, 기어코 일을 쳤으니까. 퇴근 후에 학교를 다니던 남편은 1학년은 잘 다녔는데, 2학년 1학기 교양과목은 F를 받아 장학금이 끊겼다. 늦은 나이에 퇴근도 못 하고 공부하는 남편이 안쓰러웠지만, 스무 살 현역도 아니고 책 읽고 요약하는 리포트에 F 학점을 준 교수도 못마땅했다. 그보다는 리포트로 받아온 책을 건성건성 읽고 성의 없이 리포트를 썼을 남편의 태도에 부아가 난 것이다.


나이가 들어도 학생은 학생이다. 교수님 말을 왜 듣지 않았느냐, 등록금은 어찌할 거냐면서 퍼붓는 중이었다. 큰방 옆 마루에 방을 향해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데, 느닷없이 옆방에서 현관문을 두들겼다. 우리가 사는 집은 단독주택 1층에

두 가구가 살고, 2층은 주인이 살았는데, 주인은 일 때문에 멀리 가 있어, 나에게 집을 부탁한 터였다. 옆방엔 젊은 부부가 돌쟁이 아기와 살았는데, 혼자 너무 떠들어 조용히 하라는 말인 줄 알고 미안해하며 문을 열었다.



♧ 싸우다가 김치 담는 사람


문을 여니 아기의 할머니가 시든 총각무 두 단을 내밀었다. 근처에 사시는 할머니는 얼마 전에 실직한 아들이 1톤 트럭을 사서 채소를 팔았는데, 잘하는지 궁금해서 오셨다가 시든 총각무를 우리와 나누려는 것이었다. 눈이 마주친 할머니는

"신랑을 그래 야단치지 마라."

하시며 문을 닫으셨다. 총각무를 회생시키려면 옆도 뒤도 돌아볼 틈이 없었다. 현관 밖 좁은 마당에 퍼질러 앉아 익숙하게 총각무를 묶은 끈을 풀고 뿌리를 자르고 껍질을 살살 벗겼다. 듬성듬성 자른 총각무를 작은 함지박에 담아서 소금과 물을 뿌리고 커다란 함지박을 덮어놓았다. 칼질한다고 멈췄던 포문을 다시 열고

"왜 책을 그리 읽는데, 하루에 한 장씩만 제대로 읽어도 다 읽었겠다. 그래놓고 일주일 내리 술 마시면 해결이 되나? 속 아프다고 밤이 새도록 들락날락하니 기분이 좋더나? 당신 생각에 아이들과 내가 들어있기나 하나?"

하며 코너로 몰아붙였다. 남편은 잔소리가 끝난 줄 알았다가 다시 이어지자

"시끄럽다."

며 신음인 듯 한 마디를 내뱉었다.

'"시끄럽긴 뭐가 시끄러운데."

하자, 꺼져가던 불씨가 '확' 타올랐다. 끝장을 내겠다는 기세로 삼키려던 나머지 말까지 쏟아내며 소금물에 담긴 총각무를 뒤집었다. 소금양이 알맞았는지 간은 잘 되었고, 고춧가루, 깨소금, 액젓과 마늘을 대접에 넣고 양념을 만들었다. 양파도 얇게 저며놓고는 커다란 소쿠리에 절인 총각무를 씻어 건졌다. 물기를 뺀 총각무와 저민 양파와 양념을 함지박에 넣고 고루고루 버무렸다. 왠지 다른 날보다 고춧가루 빛이 곱다. 보시기에 총각김치를 담아 옆방 현관문을 두드리니, 할머니가 놀란 얼굴로 나오시며

"지금 부부싸움 하는 거 아이가, 김치는 언제

담았노?"

하신다.

"네, 입은 싸우고 김치는 담았지요."

하며 김치를 드렸다. 부엌에 와서 아침에 끓인 찌개에 계란을 굽고, 방금 담은 총각김치와 신김치를 곁들여 상을 차렸다.

"밥 먹자."

고 하자, 아이들이 식탁으로 왔다. 남편은 멋쩍은 듯 느릿느릿 와서 숟가락을 든다. 할 말이 없었던지

"오늘 김치 간이 딱 맞다."

했다. 그때 불쑥 직장 다닐 때, 식당에서 유난스레 음식이 짠 날은 부부 싸움한 날이라고 동료들과 웃었던 일이 생각나서 피식 웃었다. 정말 간이 맞았던지 남편은 총각김치를 계란에 싸서 맛있게 먹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길에서 옆방에 살던 할머니를 만났다.

"그 싸우다가 김치 담던 사람이네."

하며 한참을 웃으셨다. 할머니는 나를 '싸우다 김치 담고, 또 싸우는 사람'으로 기억하시는 모양이다.



♧ 부부 싸움도 때가 있다


친구는 남편과 싸우질 못했단다. 나보다 10년을 먼저 결혼한 친구는 결혼 초기에는 시어머니가 계셨고, 다섯 살이 많은 남편은 혼자서 모든 걸 잘하는 사람이라 싸울 일이 없었다고 했다. 이제 남편이 퇴직을 하고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니 하나 둘 싸울 일이 생긴다는데, 어떻게 싸워야 할지를 모른다나. 그 친구를 세 번째 만난 날, 친구 집에서 봤다. 화장실 바닥에다 밥을 굴려 먹어도 좋을 만큼 깔끔했는데, 그런 성품으로는 남편에게 '빽' 하고 고함을 지를 것 같지는 않다. 친구에게 총각무를 다듬어 김치 담근 이야기를 하면서

"싸웠다기보다 서로 길들어 간 거지 뭐."

라 하자, 친구는 그땐 퍼부을만 하다고 했다.


친구는 오래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는데, 연애시절의 달콤했던 맹세가 그리웠던지

"연애할 때는 음악도 많이 듣고, 영화도 자주 보러 가고, 할 이야기가 많았었는데, 요즘은 도통

할 말이 없다."

며 아쉬워 한다.



♧ 부부 싸움도 힘이 있어야


"친구야, 우린 결혼하고 한동안 수시로 천둥번개와 용과 이무기를 부르고,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대며 보낸 시간이 쌓이고 쌓여서 이제 싸울 일이 없단다. 싸우는 것도 한 때야. 힘이 있을 때 말이지. 그때 싸우며 얻은 힘으로 지금은 좋은 친구가 됐지."

하니, 친구가 곱게 눈을 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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