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어떤 습관은 평생을 간다.
오랫동안 쓰다가 그만둔 가계부를,
몇 해 전부터 다시 쓴다.
1) 열 살의 그 습관은
국민학교 3학년 첫날이었다.
쳐다만 봐도 무서워 보이는 담임선생님은, 다음 날 준비물로 마분지와 자, 색연필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마분지라니,
도화지도 아니고. 마분지는 그때는 비쌌다.
아무튼 둘째 날에 가져간 마분지는 매끈하고 밝은 부분이 표지가 되도록 반으로 접었다. 안쪽의 꺼칠한 부분에 한 면에 열여섯 개의 가로칸을 자를 대어 반듯하게 만들고, 세로로 두 칸을 만들었다. 작은 칸에 날짜를 적고 큰 칸에는 그날의 일을 간단하게 적었다. 매끈한 표지에는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거나 예쁘고 개성 있게 꾸며야 했다. 다꾸는 자발적으로 할 때 더 예쁘고 다양하게 꾸밀 수 있는데, 검사를 받기 위한 다꾸라니.
우리는 50년도 더 전에 일종의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한 것이다.
지금처럼 알록달록한 스티커나 반짝이 풀로 이것저것 갖다 붙이면 좋았겠지만, 그때 12색 색연필도 감지덕지였다. 색연필이 없어서 크레용 끝을 갈아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만, 문제는 머시마들이었다. 늘 소리를 지르며 운동장을 뛰어다니고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여학생들의 고무줄 자를 생각에 빠진 머시마들이 다꾸를 제대로 꾸밀 수 있을까. 머시마들은 한 달이 지날 때마다 무서운 선생님의 대나무 자로 손등을 맞았다. 여학생들은 친구들과 서로 비교하면서 다꾸를 꾸민다고 나름의 디자이너가 되어 갔지만, 머시마들은 '한 대 맞지, 뭐' 하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일 년 간 열심히 다꾸를 꾸민 덕분에, 나는 지금도 백지만 받으면 오른쪽 상단 귀퉁이에 년, 월, 일을 적는다.
4학년 때 그 선생님은 다른 학년을 맡으셨다.
여자반, 남자반으로 나눠지고 중학교, 고등학교로 이어지면서, 그 선생님도 다꾸도 잊고 살았다. 그러다 오십 대 초반에 유행하던 <아이러브 스쿨> 에서 동창생들을 만났다. 여학생들은 중학교, 고등학교, 사회생활을 하면서 스쳐지나기도 했지만, 머시마들은 다 낯이 설었다. 중년의 고개를 오른다고 힘겨워보이던 머시마들은 이마가 벗겨지 거나. 배가 나오거나, 주름진 얼굴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제일 기억에 남는 선생님이
'다꾸를 만들라'던 그 선생님이라고 했다.
그러자 몸을 비틀며 아픈 시늉을 하던 한 머시마가
"니가 그 대나무 자 맛을 못 잊었나. 내가 한 대 쳐줄까?"
하고는 서로를 툭툭 쳤다. 잠잠하던 새들이 급한 듯 날아가고, 바스락거리던 가을 이파리들도 부산스러웠다. 그날 이후로 모임을 만든다고 했지만, 나는 동창들의 전화 번호를 적지 않았다.
2) 엄마의 잡책
엄마는 '잡책'을 자주 강조했다.
배추와 무를 외상으로 사간 사람과 엄마가 사 온 물건값이 제대로 계산이 되었는 지를 알아보려면 잡책에 야무지게 적어야 했다. 그중에도 외상값을 새끼 돼지나 토끼 등으로 갚으려던 사람이 있었다. 엄마는 돈으로 받기를 원했지만, 집에서 기르던 돼지나 토끼를 외상값으로 갚는 사람은 나름의 자구책이었다. 그 돼지나 토끼를 얼마간 밭에서 키우다 시장에서 팔기도 했지만, 엄마의 주종목이 배추라 돼지를 받는 건 무리였다. 밭에 돼지를 숨겨 놓고 밥을 갖다 주기도 불편했지만, 겨울 추위가 문제였다.
엄마는 꼼꼼히 손익계산을 따져 시간이 걸리더라도 외상값을 돈으로 받으려니, 잡책이 더 필요했다.
3) 딸은 피아노가 갖고 싶었지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악기를 하나씩 배웠다. 3년째 피아노를 배우던 딸은 피아노를 사달라고 했다.
왜 그럴 때가 있잖은가. 별다른 일도 없이 '돈'이 모이지 않았다. 매일 피아노 학원만 갔다 오면 시무룩해지는 딸을 보는 무능한 엄마 마음을 '피아노'가 눌렀다. 그때 머리를 스치는 생각으로 '○○ 피아노'라고 가계부에 적었다. <적자생존이라고 적는 사람이 살아남듯이, 원하는 걸 적으면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가계부를 펴면 ○○ 피아노, ○○ 피아노를 수도 없이 적었다. 어느 날, 아들이 가계부를 펴보다가
"엄마, 왜 가계부에 ○○ 피아노라고 썼는데?"
하고 물었다.
"아,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어서 생각날 때마다 적은 거다."
고 했더니, 고갤 끄덕였다.
그래서였나. 3 개월 후 디지털 피아노를 샀는데, 딸은 나무 피아노가 아닌 데다, 건반이 가벼워서 치기가 불편하다고 연습을 할 때마다 불평이었다.
신문에는 어떤 피아니스트가 종이 건반으로 연습해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유학도 갔다는데, 딸은 피아노가 그리 절실하지 않았나 보다.
그래도 넌 피아노를 가졌잖아. 딸은 고 2까지 피아노를 쳤다. 그리고 베이스 기타도 손대더니, 지금은 자취방에 성능 좋은 디지털 피아노 한 대를 들이고 싶다는데, 나는 구경만 할 일이다.
아들과 딸은 디지털 가계부를 쓰면서 나에게 디지털 가계부를 권하지만, 나는 별로다.
4) 지금 가계부에 적히는 것은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지출 내용이 뻔해서 가계부를 안 썼다. 그런데 모바일 세상에 사니, 글씨도 안 쓰고 볼펜이나 연필을 잡을 일이 없었다. 어쩌다 메모를 위해 볼펜으로 글씨를 쓰면 손가락 에 힘이 안 들어가 글씨가 제대로 안 써졌다.
그때부터 가계부로 매일 몇 글자라도 글씨를 쓴다.
그러다 메모장에 글을 쓸 때도 있지만, 지금 가계부에 적히는 것은 몇 년 전과 많이 다르다.
나이가 들어서인가.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고
간간 이상증세를 느껴 초음파 검사비가 많이 든다.
오늘도 손이 아파서 양손 초음파 검사를 하고 왔다.
김치 담을 때 눈물이 날 만큼 손이 아프더니, 그게 신호였나.
아무튼 노년기 초입에는 건강을 위한 지출이 1순위다. 별로 유쾌하지 않은~~~.
한 번에 볼 수 있는 가계부는 기억을 떠올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