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이다. 움직임으로 자기 확신을 만든다. 그게 내 방법이다.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
자아도취를 타파하는 사랑의 기술이라고 하기에 저장해 본다.
객관성, 이성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본다. 겸손한 태도로.
상황에 매몰되지 않는다. 친구라면 나에게 뭐라고 말해줄까 하며 본다는 것이다. 상황 자체를 묘사한다. ㅇㅇ가 물을 따르고 있다 등으로. 가수 경서의 “밤하늘의 별을 따서 너에게 줄게”라는 노래를 틀어둔 남편에게 말했다. 그 노래 100번은 듣는 거 같다.라고 말하자마자 아이는 쪼르르 달려가서 말한다.
“ 아빠 그 노래 엄마가 끄래!”
어디에도 끄라는 소리는 안 들어가 있는데, 내 말에 아이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나중에 들어보니 아이는 그 노래가 좋다고 말했다.
나도 그 노래가 입에 붙은걸 보니 좋은 거도 같다.
바라는 대화거리가 될 것이다. 노래 꺼! 하는 찬물을 끼얹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렇다. 아이처럼 미리 짚고 움직인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고 판단을 넣지 않는다. 물어본다.
그게 필요하다. 아이를 보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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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이거 연습하면 돼. 노력하면 돼, 가 기본 전제여서 겸손하지 않은가 보다. 아니다. 재능은 재능인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박수를 친다. 그런 건 저걸 나도 잘하고 싶다. 그런 거라고, 합리화 말고 부럽다고, 못 한다고, 그럼에도 원한다면 그 방향으로 간다.
아니라면 포기로 간다.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는 키이기도 하다. 시작은 인정에서, 그리고 여기까지다. 겸손한 태도는 어떻게 가져오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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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발달. 이것 또한 숙제다. 감정적으로 두려워하는 걸 누르고 시도하고*100 부딪힌다. 쌓아간 성취경험으로 이건 돼, 이건 될 거 같다. 그런 걸까? 수치로,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가본다. 여전히 이성적이라는 것도 모르겠다. 그런 사람 옆에서 있으며 그렇게 생각하는 걸 좀 들여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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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가, 뭐든 다 할 수 있을 거라 여긴다. 될 거라고 지른다.
저 책상마저 내가 만들 수 있을 거 같은데? 하는 터무니없는 확신을 한다. 만드는 건 할 수 있으니까.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에서 오는 소리다. 이게 겸손하지 않고 객관적이지도 않고 이성적이지도 않다면 그럼 만들어보자. 그래보자! 이게 내가 뭔가 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진실로 만들어간다.
그렇다면 좋은 방향이어야 한다.
스스로가 원해서 하는 것이어야 하고,
보여 주기 위해서도 아니며, 선한 목표와 의도여야 한다.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기 위한
세 가지를 발견해서 눈이 번쩍 띄었다.
(어디선가 놓인 책장에서 마지막 장만 찍어와 읽었다. )
다 될 거라고 보고 있다면, 균형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마지막에는 신앙을 말했다. 종교적 신앙이 아니다.
그건 어디선가는 신념이라 말하는 것으로 읽혔다.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가를 써놓고 물음표를 쳤었다.
아무래도 신념이 없다며, 60개 낱말 중에 망설이던 것에서
바뀌고 있다. 중요한 걸 찾아 만드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