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계의 그을음을 견뎌온 당신에게
안다,
어쩌면 그대도 깊은 길을 걸어온 자라는 걸
그 길은 부모도, 그 누구도 걸어줄 수 없었던 길
오직 당신 혼자 오롯이 쏟아지는 가시와 밤을
견뎌야만 했던 길
우습지 않은가
나 역시 어쩌면 그때, 당신의 그 옆길을 걷고 있었다
이 우주는 고독이 아닌가, 고독이 아니라면 이 한 줄기 서늘함은 무엇인가
우주엔 가윽한 별 흐르는데 어찌 나에게는 수억의 지네
이토록 어둡게 움틀거리는가 휘파람처럼 흐르고 있었다
차마 스스로 생을 마감할 용기 나지 않아
바스락 낙엽을 밟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 옆
당신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당신도 작고 뜨거운 숨을 부비작거리며 운명과 맞서싸우고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나는
조금 더 의연하게 그 길을 건널 수 있었을까
혼자가 아니구나 총총 휘파람 같은 별을 불며
달릴 수 있었을까
당신의 길은 어때? 여긴 깨부수어야 할 좀비들이 너무 많아 망할 녀석들
전사처럼 씨익 이 하나 빠진 검
햇살에 비추며 장난스럽게 웃을 수 있었을까
그럼에도 생이란 참으로 묘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우리는 돌고 돌아 다시 여기서 만났다
당신은 당신이라는 긍지로서
나는 나로서
각자의 운명이 공기처럼 팽창하며 터지 듯
지금 이곳에선 당신과 나라는 불꽃 한 점이
보아라,
아름답게 피어나고 있다
사랑한다
그대여
그대의 이름 하나 온전히 알지 못하는 나이지만
내 옆에서 힘껏 자신의 길을 달려온 당신을
아이에서 소년으로,
소년에서 어른까지 자라온 그대를
문득 사랑한다, 고 느낀다
운명은 이미 그대를
인정한 게 아닌가, 운명을 넘어설 자라고
그 많은 밤을 결국 다 건너왔다고
그러니 감히, 그대를 깊은 자라 칭해본다
더 깊은 곳까지, 더 높은 곳까지
가실 자라 불러본다
내 길의 옆에서 힘차게 달려와 준 그대가
고맙다
이름도 모르는 그대여,
그대라는 영혼을 사랑한다,
글이라는 전류를 통해
당신이란 영혼과 닿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 그림 - 박향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