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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라 Nov 26. 2022

중증장애인센터에서 15년 봉사활동을 하다 보니

15년 전쯤 선배의 권유로 중증장애인센터 봉사를 시작했다. 봉사는 주말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다 저녁 식사를 도와주는 일로 마무리됐다. 거실과 방, 곳곳에 흩어 앉아 있는 사람들 앞에 1인용 책상을 놓았다. 그다음, 목에 넓고 도톰한 비닐 앞치마를 둘러주었다. 선배 봉사자들이 앞치마를 책상 위로 쭉 늘어뜨리기에 나도 따라 했다. 센터 근무자들이 배식 수레를 밀고 거실로 왔다. 그들은 식판을 쭉 늘어놓고 음식을 덜어 넣었다. 어떤 식판은 가위로 반찬을 잘게 자르기도 하고 믹서기로 모든 음식을 갈아 죽처럼 만들기도 했다.    

  

봉사자들은 배정받은 식판을 받아들고 일대일로 저녁을 떠먹였다. 음식은 반은 입으로 들어가고 반은 앞치마로 질질 흘려 내려왔다. 아기가 이유식을 오물오물 받아먹는 사랑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입가 근육이 불완전해 음식을 넣어도 스스로 씹지도,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약간의 음식만을 입안에서 씹는 듯 넘길 뿐이었다. 음식물이 섞인 혼탁한 침과 입에서 토해낸 국물과 반찬이 입술 아래로 질질 흘러내려 턱밑 앞치마를 타고 내려왔다. “어, 어, 어” 알 수 없는 음성이 나왔고, 반찬이 먹기 싫은지 밥을 먹다 말고 입을 다물기도 했다. 겨우 식판의 음식을 다 떠 넣어 먹였다. 주위를 보니 봉사자들이 입가를 닦아주며 식판과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나는 손이 그의 얼굴에 닿으면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처럼 최대한 접촉을 피하며 그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목에 두른 앞치마 끈을 풀고 내용물이 새지 않게 모아 잡으며 정리했다. 1인용 책상도 접었다. 그것으로 그날의 봉사는 끝이 났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를 몰았다. 집에 도착하자 누군가 말을 걸 새라 서둘러 옷을 벗어 던지고 씻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몸이 더럽다고 느꼈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음식들이 질질 흘러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샤워 내내 알 수 없는 괴성과 울림이 메아리로 들려왔다. 매스꺼웠다. ‘다음 번에도 봉사를 할 수 있을까?’ 덥석 가겠다고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날의 경험은 먹는 것, 말하는 것만큼은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들 속에 살아온 나에게 낯설고 불편한 충격이었다.    

  

약속이기도 했지만 ‘봉사는 옳다’는 생각에 어색하고 불편한 봉사는 계속됐다. 언제부턴가 센터의 이용자들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졌다. 아이들에게는 ‘혜인아!, 종우야!’, 센터직원이 60세는 됐다고 알려준 그녀에게는 ‘혜정 이모님’이라고 불렀다. 다른 성인 이용자들에게는 ‘영수씨, 철수씨’라고 했다.    

  

그곳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각자의 스토리가 있는 듯했다. 선천적 장애로 그곳에 오기도 하고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도 있었다.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계속 침을 흘리는 사춘기 소녀 혜진이는 어눌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코리아가 될 거에요”. 복싱선수처럼 보호대가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지만, 눈이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혜진이었다. 그녀는 만날 때마다 나에게 같은 말을 했다. 어렸을 때 사고로 중증장애를 갖게 된 그녀에게 ‘미스코리아’라는 단어가 뇌 한편에 깊이 자리 잡은 듯했다. 

그런 그녀에게 내가 말했다. “맞아요, 우리 혜진이 미스코리아가 될 거에요. 그러려면 밥도 잘 먹어야겠지요. ‘아’ 하세요”     


다음번 봉사에서 내가 식사를 도와준 사람은 한눈에 보기에도 젊고 잘생긴 훈남이었다. 소리 낼 수도 스스로 몸을 가눌 수도 없어 침대에 누워있었다. 말 그대로 중증이었다. 그는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퇴근하다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 다 키웠다고 마음을 놓았을 텐데. 그런 아들이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태로 이곳에 누워있었다.     


건강하게 태어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사고로 정신도 육체도 조절할 수 없는 상태로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우리도 어쩌면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 있다는 사실에 몸이 떨렸다. ‘나도 저렇게 될 수 있지, 이 아이들의 부모일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니 건강하게 태어나준 우리 아이들이 고맙고, 감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시선도, 침 묻은 얼굴을 닦아주는 내 손도 부드럽고 따뜻해졌다.      


책가방을 챙기는 센터직원을 보고 그곳에서도 아이들이 학교 다닌다는 것을 알았다. 센터에서 생활하지만, 통학버스로 특수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다행이었다. 학교에서의 아이들이 궁금했다. 괴성의 울림으로는 다른 사람에게 생각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걸 아이들은 알까? 말로도 글로도 알 수 없는 그들의 마음을 선생님들은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그사이 근무지 몇 군데를 거쳐 2019년 특수학교인 영지 학교로 발령 났다. 나는 ‘특수’와는 거리가 먼 행정팀장이었다. 휠체어에 몸을 맡기고 힘없이 늘어져 있는 아이, 고래고래 알 수 없는 괴성을 내며 뛰어다니는 아이, 점심시간이면 더 분주해지는 급식실 풍경까지 모든 것이 익숙했다.      


장애인을 옆에 두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과는 다른 모습에 거부감이 들지모른다.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피할 수도 있다. 나도 그랬으니까. 불편한 경험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곳을 유치원부터 대학과정까지 있는 ‘어지럽고 복잡한 직장’으로 정의했겠지만, 나에게 영지 학교란 조금은 불편한 신체를 가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성장하는 배움의 장소였다. 출근하는 발걸음이 온화하고 가벼웠다. 센터에서 아이들만 봐왔다면 그곳에서는 매일 아침, 아이와 함께 오는 부모님을 볼 수 있었고 그들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학교에 오는 아빠, 엄마, 이모, 삼촌 모두가 나와 같은 평범한 어른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직접 수업을 하고 밥을 먹이고 돌보는 것은 아니지만 내 자리에서 보탬이 되고 싶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에서 즐겁게 배우고 행복하게 생활하기를 바라는 건 책에서 배운 것도 누구의 강요도 아니었다. 불편함과 매스꺼움으로 시작한 봉사활동이 경직되고 딱딱한 내 심장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코로나 19 상황으로 봉사활동을 못 간지 몇 년이다. 그 사이 아이들은 많이 컸겠지. 내게 사랑과 감사를 가르쳐준 그곳에서 다시 그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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