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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라 Jan 31. 2023

세 여자, 해운대에 갇히다!

연말 부산 출장이 잡혔다. 1박 2일간 분야별로 진행되는 꽤 규모 있는 회의다. 우리 부서 업무별 담당자 셋은 롱패딩에 두꺼운 옷을 겹겹 입고 굴러갈 듯 부산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간이 빠듯한 탓에 점심도 건너뛴 채 부산공항에서 해운대로 향했다. 도착 후 짐을 두러 객실로 갔다. 창가 커튼을 젖힌 순간 위에서 내려다본 해운대는 차가운 촉감을 두꺼운 유리창 사이에 감춘 채, 화창한 봄의 자태를 연출했다. 온통 파란 하늘과 바다, 찐한 하얀색 구름이 ’내가 구름이야‘ 라고 말하고 있었다. 서둘러 회의장으로 내려와 준비된 커피와 쿠키로 피로를 달랠 때쯤 회의가 시작됐다. 강연 발표를 듣고 있을 때 문자가 날아왔다. ‘12/23일 부산출발 KE1541편이 기상악화로 결항 되었습니다.’ 내일 제주로 돌아갈 항공편이었다.  

   

롱패딩이 무색할 만큼 부산 날씨는 이리도 화창한데 당황스러웠다. 인터넷을 보니 제주공항 기상악화로 우리가 제주에서 출발한 직후 모든 항공편이 결항이었다. 차라리 우리가 출발하기 전에 결항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텐데. 불평할 새도 없이 우린 다음 다음날 항공편이라도 예약해야 했다. 비행기가 뜰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빈 좌석을 찾아야 했다. 3명은 동시에 항공사에 접속하며 빈 좌석을 찾았다. “제주항공 저녁 6시 때 자리 있어요. 빨리 들어가세요” 내가 들어갔을 땐 이미 마감이었다. “늦었어” “대한항공 저녁 7시 때 나왔어요, 로그인하셨죠? 빨리요” “벌써 끝났어.” “에어부산에 자리 있어요, 빨리요” 회의실 한편에서 엄청난 속도로 핸드폰을 눌러대며 어렵게 12월 24일 항공편을 예약할 수 있었다. 23일 탁구장에도 갈 수 없었고 주말 약속된 일정도 소화할 수 없게 됐다. 해결할 수 없는 걱정에 회의장 마이크 소리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우중충한 마음으로 준비된 만찬을 기다릴 때쯤 저편에서 같이 출장 온 선배가 통화하고 있었다. 그것도 유쾌한 목소리로. “그럼, 괜찮지요. 자기 돈 들이면서 일부러 시간 맞춰 부산 해운대에 놀러 오기도 쉽지 않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하늘이 도와주네요. 일정 끝나면 우리 셋이 맘 편히 있다 갈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순간 턱 하니 머리를 얻어맞은 듯했다. 난 계획이 다 틀어진 것만 걱정하며, 출장 일정 이후의 시간은 버려진 시간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부산에 왔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나였다. 평소에도 선배를 좋아했지만, 선배는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현재를 사는 그녀였다.      


우선 하루 더 묵을 숙소를 잡아야 했다. 주최 측에서 예약한 그곳은 다음 날 예약이 이미 차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점이었지만 빠른 핸드폰 터치로 근처 다른 숙소를 잡았다. 새롭게 숙소를 잡고 보니 우린 진짜 여행자가 된 거 같았다. 해운대의 하루를 어떻게 온전하게 즐길지 행복한 고민을 해야 했다. 바뀐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니 제주에서 매일 보던 바다도, 거리 풍경도, 사람들의 억양도 제주와 달랐다.      


부산의 밤은 하얀 눈 없이도 얼굴이 시릴 만큼 차가웠다. 도심에 나갔던 우리를 다시 해운대로 데려다준 택시기사는 오늘이 부산에서 제일 추운 날이라고 귀띔해줬다. 해운대는 별빛 축제로 길 전체가 조명으로 가득 찼고 추운 날씨도 아랑곳없이 사람들로 붐볐다. 제주의 바다가 고즈넉하게 넓게 펼쳐 졌다면 겨울날 해운대 바다는 고층 빌딩에 둘러싸인 드넓은 호수처럼 잔잔하고 반짝였다. 모래사장의 불빛은 유치원 재롱잔치 조명처럼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며 보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우린 추위도 잊은 채 모래를 밟을 때마다 깔깔대며 웃는 아이들이었다. ‘십 원 빵’을 길게 줄 서서 기다렸다. 마침내 커다란 십 원짜리 동전 모양의 빵 꼬치를 손에 들고 연신 ’맛있다‘ 외치며 거리를 횡보하는 여자 셋. 집에 못 들어간 우리였다.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라 한 컷의 프레임이라는 이어령 선생의 말이 떠오른다. 오늘 나는 그녀들과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찍었다. 1월 1일 선배가 다른 곳으로 발령 날 것을 알기에 우리가 함께한 모든 순간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도 기꺼이 ‘여행’이라는 행복을 선택한 선배, 투어 가이드처럼 적극적 여행자로의 자질을 보인 따뜻한 후배. 해운대에서 알게 된 그녀들의 진면모였다.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는 선생의 말처럼, 집에 못 들어간 날 해운대에서의 멋진 추억, 그 역시 내가 받은 선물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봄날 같은 해운대 겨울 바다 /  빌딩 속 해운대 밤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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