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어 주문한 책들과 선물 받은 책들, 다시 읽고 싶은 책들과 읽다 만 책들이 책꽂이와 책상 위에 가득 자리 잡고 있다. 퇴근 후 탁구장을 다녀와 샤워 후 몸과 마음이 평온한 상태에서 책을 읽을 때, 그 순간이 나의 가장 행복하고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계속 줄어들더니 마침내 사라져 버렸다.
범인은 탁구다. 퇴근 후 서둘러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동시에 집안 정리를 한 후 탁구장으로 성급히 간다. 정시에 퇴근했다면 저녁 8시 전후로 탁구장에 도착한다. 레슨 받고 잠시 회원들과 탁구 하고 나면 9시는 금방이다. 아쉽지만 라켓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책과 두 번째 데이트를 즐기는 게 나의 루틴이었다.
그런데 탁구를 하면 할수록 욕심이 생겼다. 조금만 더 뛰면 왕초보 딱지는 뗄 수 있을 것 같았다. 탁구장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더니 집에 돌아오면 이미 취침시간이다. 수면시간을 줄일 수는 없었다. 늦게까지 책을 읽다 자면 다음 날 컨디션 조절에 실패한다. 하루가 멍하고 집중력이 떨어져 괜스레 무엇을 해도 공허한 기분이다. 잠이 많고 민감한 나이기에 잠의 영향력은 상당하다. 그렇게 2022년 한해는 쌓아둔 책 표지를 감상하는 것만으로 지나가고 있다.
아이러니하지만 책을 밀어낸 주인공인 탁구를 시작하게 된 것은 책 덕분이다. 어떤 책이라고 할 것 없이 독서를 할수록 ‘해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할까. 내 안엔 호기심이 많다. 하지만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드러나지 않았던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안 되는 이유만 찾던 내가 해야 하는 이유를 찾게 됐다고나 할까. 망설이다 탁구장을 다닐 때쯤 운동을 그만둘 수 없는 온갖 이유가 적혀있는 <운동화 신은 뇌>라는 책도 읽게 됐다. 운동이 주는 효과로 우울증과 치매 예방, 심장 혈관계가 튼튼해지고 뇌세포 간 연결 강화로 뇌의 연결망을 확장하여 기억력, 인지 기능, 감정조절 능력을 개선하고 비만 예방, 면역체계 강화한다는 등 좋은 이야기는 다 적혀있었다.
그런데 내가 탁구를 계속한 건 책에서 말한 효과 때문이 아니다. 그냥 탁구가 좋았다. 누구보다 움직임을 싫어하고 칙칙하고 진득진득하게 땀나는 것을 싫어했던 내가 이제 그 땀이 좋아졌다. 동작이 굼떠 작고 귀여운 공을 쫓아가지도 못하지만, 속옷까지 흠뻑 젖은 땀을 씻은 후 몸이 가벼워지는 상쾌함과 만족감이 나를 매료했다. 에너지 레벨이 높아지고 있다는 걸 느끼기 시작하자 자꾸만 그 기분을 다시 만나고 싶은 충동도 생겼다.
책 역시 매력 있다. 소설책도 만화책도 아닌 인문 서적을 보다, 빵 터져 웃고 있는 나를 볼 때면 ‘참, 책이 재밌나 보다’ 는 생각이 든다. 책은 나를 생각하게 했고 움직이게 했다. 탁구로 흘리는 땀처럼 즉각적으로 나타나는 성과는 없지만 내 삶을 지탱하게 할 중요한 일이란 걸 안다. 그런데 내 안의 호기심 많은 아이가 좋아하는 책 읽기는 그 아이가 알아버린 다른 재미에 밀려 후 순위가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탁구 실력은 나아졌을까? 작년보다 약간 좋아졌다. 왕초보에서 초보로 전환 정도다. 영화도 1.5배속으로 보는 시대에 나의 탁구 배움은 더디고 느리기가 0.5배속이다. 그래도 탁구장에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앞으로 계속 나가고 있다. 어설프게나마 대회 단체전에서 이바지한 적도 있으니 그건 어깨가 올라갈 만하다. 아직 그 정도다. 독서와 탁구 시소 타기의 균형이 필요하다. 2023년에는 나의 책들을 위해 시간의 지정석을 내어줄 생각이다. ‘지금은 당신의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