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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라 Jan 22. 2023

종로3가역 그녀

서울행 출장이었다. 출근 시간을 넘긴 늦은 아침, 지하철은 비교적 한산했다. 나는 지난 대회 때 동호회 회원이 찍어 준 경기 영상을 리플레이하고 있었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플레이를 보며 ‘이게 나야? 왜 이러니, 도대체 레슨 받을 때랑 왜 이렇게 다른 거야’ 나도 모르게 푸념이 튀어나왔다. 투덜대는 내 목소리에 옆자리에 같이 출장 온 선배가 말을 건넸다. 평소 나의 탁구 사랑을 아는 그녀였다.      


“대단하네!, 여기서도 탁구 보는 거야? 유튜브 아니고 자기 영상이네. 뭐가 잘 안돼?” “다리 보세요, 움직이질 않아요. 그냥 서 있다고요. 멍청히.” 정지 버튼을 터치하며 말을 이었다. “스윙할 때 팔을 앞으로 뻗으면서 나가야 하거든요. 그런데 팔을 눈앞에서 깔딱하고 접어버려요. 이러니 공이 다 네트에 걸리지요, 속상해요” 나는 그녀가 이해하기 쉽게 앉은 채로 스윙 동작을 해 보였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탁구를 배웠다는 그녀는 기억을 더듬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팔을 앞으로 보냈던 거 같아.” 그녀가 팔을 뻗는 시늉을 했다. 나는 내친김에 앉은 채로 발을 굴렀다. “공이 오는 방향으로 발을 움직이면서 박자를 맞춰야 해요. 그래야, 공을 몸으로 잡으면서 스윙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나는 재생 버튼을 다시 눌렀다. 영상 속 주인공은, 마치 지구 중심이 끌어당기는 엄청난 중력에 꼼짝달싹 못 하는 사람처럼 뒤꿈치까지 꼭 바닥에 붙이고 있었다.  


우리가 탁구 이야기에 열을 올리는 사이 방송은 종로3가역을 알렸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그제야 지하철 안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한 사람, 유독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 환승역이라 앉아있던 사람들이 꽤 많이 내렸다. 그 무리 속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승강장에서 나를 쳐다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기분을 예전에도 느꼈다. 고등학교 때 집으로 가는 길에 젊은 커플이 반대편에서 나를 향해 다가왔던 기억. 흔히 말하는 ‘도를 아십니까?’ 커플이었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녀는 12월 얼음 날씨를 완벽 방어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어깨 정도의 머리에 검은 니트 모자를 썼다. 반짝이는 펄이 들어간 진한 빨강의 두꺼운 모직 코트에 장갑을 낀 영락없는 서울 멋쟁이 중년 아줌마였다. 그런 그녀가 웃음 띤 얼굴로 점점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탁구 치시나 봐요? 좀 전에 말하는 거 들으니까 이제 배우는 거 같던데”

“네”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마 3년째 이러고 있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스윙할 때 팔꿈치가 오른쪽 젖꼭지에 온다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손은 얼굴을 지나겠지요. 경례하는 게 아니에요. 팔꿈치를 생각하세요” 핵심만 짚어주려는 듯 그녀는 힘 있는 목소리로 짧게 설명했다. “실력이 어느 정도 될 때까지 손목은 쓰지 말고 팔꿈치로 치세요, 혹시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 주시고요, 제가 고등학교에서 탁구를 가르쳐서 도움드릴 수 있어요.” 절도 있고 간결한 말이었지만 진심과 따스함이 묻어났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가 좀 멀리 살아서요” “괜찮아요, 저도 멀리 살아요, 화곡동이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전 제주에 살아요”

“제주요?” 그녀는 놀란 듯 되물었다. 제주에도 지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그 시간 서울, 그 많은 사람 중에 내가 있는 지하철 칸에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들었고, 기꺼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온통 탁구 생각뿐인 내게 온 우주가 말을 걸어오는 기분이었다. 나의 찌질한 탁구를 응원하기 위해 하늘이 보낸 메신저라도 된 듯 우연하고 신기한 만남에 마음이 들떴다. 정신이 홀린 듯 지하철에서 나와 목적지까지 걷는 내내 주위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팔을 휘둘러 댔다. 정말이지 하늘이 계획한 각본이었을까. 그렇다면 그녀는 천사?     


문자로 번호를 알려달라는 그녀의 말에 제주에 도착하자 문자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오늘 종로3가역에서 이야기 나눴던 탁구 치는 사람입니다. 알려주신 말씀 잘 기억할게요. 고맙습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네, 탁구는 참 좋은 운동이에요.’ 천사의 답장이었다.    

 

어둠이 내린 제주공항은 서울보다 싸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제주의 얼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나도 누군가의 마음을 뜨겁게 할 수 있는 탁구 천사가 될 수 있을까?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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