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꿀단지 하나를 다 비운 ‘곰돌이 푸’처럼 그의 배는 동그랗다. 그 덩치로 사뿐히 탁구대를 왔다 갔다 한다. 유니폼은 국가대표급인 사람들 사이에서 동네 슈퍼에 라면 사러 갈 때 입는 츄리닝 바지에 헐렁한 라운드 티를 입고 있다. 애당초 탄력 있고 쿠션 좋은 탁구화는 생각이 없다. 슬리퍼 대신 운동화라도 신으면 다행이다. 그래도 요리조리 공을 잘도 넘긴다. 그것도 왼손으로.
탁구장에서 한 달에 한두 번 마주치는 회원이 있다. 동호회 명단을 보니 관장, 코치 다음으로 잘치는 회원이다. 그래선지 탁구장에서 연습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가끔 구장에서 마주칠 때면 딱 봐도 눈에 띄게 허술한 내 공을 코치처럼 받아준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왼손 게임을 제안했다. “회원님! 요즘 실력이 좀 나아진 거 같아요. 저랑 왼손으로 게임 한 번 해보시겠어요?” 이유가 마음에 들었다. 처음 탁구장에서 나를 봤을 때, '몇 달 다니다 말겠지’라고 생각했다는 그다. 내 오른손의 실력을 보여줘야지.
그는 왼손으로 라켓을 잡았다. 매우 안정적이었다. 가볍게 서브도 넘겼다. 내 공을 살짝 넘기기만 하는데도 점수를 받고 있다. 난 분명 오른손인데. 몸이 더워지기 시작한다. 공격하는 것마다 실수 연발이다. 그래도 공은 때리고 싶다. 살살 약이 오른다. 공을 받기 위해 탁구대 좌우를 허겁지겁 뛰어다닌다. 매번 늦고 매번 점수를 내어 준다. 너무 쉽게 3대 1로 졌다.
“다시 한게임 해요. 복수전이요”
‘설마 왼손인데, 좀 전은 내가 공격 실수를 많이 해서 그런 거야’
이번은 이길 수 있을 거 같았다. 한 세트 승. 두 세트 승. 그제야 그가 여유 부리듯 한마디 한다. “이 게임도 슬슬 땀이 나네요” 난 처음부터 땀나게 뛰고 있었는데 불공평하다.
2대 2로 5세트가 시작됐다. 갑자기 낯선 서브가 들어온다. 공을 받지 못했다. 서브가 어떤 종류인지 알면 받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살짝 미소를 띠며 물어봤다. “회원님! 방금 무슨 서브예요?” 완벽한 대답이 돌아왔다. “게임 중에 물어보는 거 아니지요.”
움직임이 둔한 나를 트레이닝시키듯 빈 곳으로만 공이 갔다. 공은 나보다 빨랐다. 얄미운 게 앞에 있는 사람인지 그의 왼손인지 모르겠다. 이미 약은 올랐고 등줄기로 땀이 흐르면서 열이 났다. 복수전도 3대 2로 졌다.
그는 재미를 붙였는지 다른 회원과 왼손 게임을 계속했다. 옆에서 보자니 방금 나와 칠 때와 사뭇 다르다. 진지하게 상대 공격을 넘긴다. 되려 공격으로 받아친다. 빠른 서브를 받는 것도 안정적이다. ‘뭐야! 좀 전 경기는 몸풀기였나!’ 확 열이 오르더니 이내 그의 왼손이 부러워졌다. 내가 지금껏 연습해도 안 되는 걸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저리 쉽게 하고 있으니. 얄밉기가. 얼마나 왼손으로 탁구 쳤을지 궁금해진다.
무엇인가 한 분야에서 성공하려면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한다. 난 탁구로 성공할 생각은 없다. 그냥 동네 탁구장에서 사람들과 편하게 칠 수 있는 실력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렇다면 1만 시간의 절반인 5000시간 정도면 되지 않을까. 계산해보니 퇴근 후 주 3회 2시간씩 치면 16년을 연습해야 5000시간이 된다. 아직 멀었다.
여전히 로봇 같은 내 팔아! 다리야!. 좀 뛰어보자. 곰돌이 푸 회원이 왼손으로 탁구 칠 때 상대가 오른손이란 걸 느끼게 해주자. 왼손으로 이리저리 빼는 공을 되려 보란 듯이 넘겨보자. 한 달 후면 2023년이다. 새해 , 나의 ‘위시리스트’에 하나를 추가했다. ‘게임 시작부터 왼손 회원 땀나게 하기. 몸풀기 게임하려다 큰코다치게 해 주기’. 혹시 그가 양손잡이인지 확인부터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