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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라 Oct 13. 2022

로봇 탁구, 그녀의 숨겨진 한 방!

탁구 이야기


취소할 수만 있다면 ‘제주도지사기 탁구 대회’신청을 무르고 싶었다. 퇴근 후 나의 거의 모든 시간을 탁구장에 쏟아붓고 있지만 요즘 난 터무니없는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11점이면 끝나는 한 세트에 무려 4번이나 서브 실수로 점수를 내주기도 하고 상대 서브를 못 받고 끝나기도 한다. 찬스 공이 올 때도 하늘로 날려 보낸다. 조그맣고 귀여운 탁구공이 자꾸만 무서워진다.


개인전이야 혼자 책임질 몫이지만 단체전은 좀 다르다. 제일 하위 부수인 초심부는 참가 최소 인원이 3명이다. 동호회에 초심부 회원이 여럿 있지만, 그날 대회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실력 있는 언니 두 명과 나뿐이다. 망설여졌다. ‘내가 신청해도 되나.’ 언니들이 말했다. “네가 없으면 우리는 단체전 자체를 신청 못 해. 네가 있어서 나갈 수 있는 거야. 부담 갖지 말고 같이 나가자, 괜찮아.”


한 달 전 그 말을 들을 때까지만 해도 마음은 편했다. 하지만 대회가 다가올수록 빈번해지는 나의 허망한 실수들이 나를 옥좨 왔다. ‘연습 때 반만이라도 경기에서 발휘할 수 있기를, 서브라도 제대로 들어가기를’ 이 정도 소원은 누군가 들어줄 거란 바람으로 내게 기운을 넣었다.


단체전은 8개 팀이 2개 조로 편성됐다. 조 2위까지 4강에 올라간다. 3단식인데 1, 2, 3번 순서를 정하는 ‘오더’가 중요하다. 제일 허약한 내가 상대 팀 에이스를 만난다면 우리 팀 승률은 높아진다. ‘승’을 위한 게임의 법칙이다.


예선전 첫 경기 상대는 ‘고현우 탁구센터’다. 우리 팀 에이스만 이기고 나와 다른 회원은 졌다. 1패다. 두 번째는 ‘K 탁구’다. 서브는 잘 받았지만 자신 있게 스윙하지 못하고 졌다. 2패.


예선 마지막 팀은 ‘남원탁구’다. 우리의 바람대로 1번이 에이스였고 경기가 시작되자 그녀는 가볍게 공을 넘겼다. 특별할 것도 없는 공 같았는데 나는 쉽게 공을 넘기지 못했다. 리시브가 네트에 걸리기 시작했고 ‘멍’ 증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뇌에 낀 안개가 짙어지며, 같은 서브에 같은 리시브로 점수를 내주고 있었다. 1세트 패, 2세트 패, 마지막 3세트 중반. 서브하려다 말고 안쓰러운 듯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이거 커트야”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의 말이 튀어나왔다. 벌어진 입도 다물어지지 않았다. 알려준 답으로 서브는 넘겼지만 이미 굴욕컷을 찍은 뒤였다. 3패.


우리 팀은 조 2위로 본선 4강에 진출했다. 4강 상대는 다른 조 1위로 올라온 ‘삼화 탁구동호회’다. 이번에도 상대 팀 에이스와 맞붙었다. 리시브 실패가 나오자 다시 안개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생각이란 걸 하면서 겨우 리시브에 성공했을 땐 벌써 3세트였다. 4패.


다행히도 나의 4패와 상관없이 우리 팀은 상대 2명을 가볍게 이겼고 단체전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 오는 동안 난 전패했고, 언니들의 ‘승’에 숟가락을 얹었다. 나의 유일한 기여는 단체 인원 3명을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우리 팀이 결승에 진출했다는 소식에 경기장 곳곳에 흩어져 있던 동호회 사람들이 하나둘씩 몰려오고 있었다. 결승 상대는 우리 조 예선 1위인 ‘고현우 탁구센터’다. 예선전 첫 상대인 그 팀을 다시 만날 거라곤 예상 못 했다. 경기 시작 전 동호회 동생이 외쳤다. “언니, 이번 1승 가요!” 나는 씁쓸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말이 되는 소리야. 이제껏 전부 졌다고.’


결승전 오더는 1번이 에이스 언니, 3번이 나였다. 상대 팀 오더도 예선 때와 전부 달랐다. 탁구대를 둘러싼 펜스에는 두 동호회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찼다. 3개의 탁구대에서 경기는 동시에 시작됐다.


공 넘기기 싸움이다. 내가 먼저 시작한 서브에서 점수를 땄다. 심지어 상대 서브도 받았다. 서브와 리시브가 자연스러워졌다. 어느 순간 커다란 환호 소리가 들렸다. 점수판을 보니 내가 이겼다. 1세트 승. 2세트가 시작되자 문제가 생겼다. 라켓을 앞으로 밀며 툭 공을 넘겼는데 네트에 걸렸다. 리시브가 안 된다. 다시 ‘멍’의 세계로 들어간다. 위험신호다.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살짝 공을 위로 올리면서 가볍게 넘기세요. 리시브는 세게 하는 거 아니에요. 가볍게 넘기세요.”


상대가 서브를 준비하자 탁구대에서 살짝 떨어져 스탠스를 넓히고 리시브 자세도 낮췄다. 공을 최대한 가볍게 올리면서 넘겼다. 성공이다. ‘후’하고 불면 흩어지는 민들레 씨처럼 뇌 안개가 소리 없이 걷혔다. 경기에 부담도 없었다. 지금까지 ‘전패’라 다시 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경기를 내가 주도하고 있었다. 1세트 승, 2세트 승, 마지막 3세트다. 이번 세트만 이기면 1승이다. 욕심을 라켓에 실으면 공이 무거워져 나가질 않는다는 걸 알기에 최대한 침착하려 했다. 1, 2점 차를 반복하며 앞섰다. 자칫하면 뒤집히기 딱 좋은 점수다. 이제 사람들의 말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손도 팔도 심장도 머리까지 다 내 것이 아닌 듯 따로 움직였다. 3세트를 내준다면 흐름을 뺏겨 밀릴 수 있다. 여기서 멈춰야 했다.


그녀와 나는 서로 공격 눈치를 보며 공을 살짝살짝 넘기고 있었다. 나의 오른쪽으로 공이 넘어왔다. 서두르면 실수다. ‘기다려!’ 나도 모르게 자세를 잡았다. ‘하나, 둘’. 연습 때와 같은 정확한 스윙으로 공을 상대 탁구대 구석으로 보냈다. 득점이다. ‘9 대 8’. 이제 2개만 잡으면 내가 이긴다.


급해진 상황에서도 상대는 침착했다. 그녀는 공을 가볍게 보냈고 나는 받지 못했다. 스윙 하나에 감동할 때가 아니었다. 그녀가 다시 내 서브를 받아넘기자 랠리가 시작됐다. ‘좋은 공만 친다.’ 일단 공을 넘겼다. 기회가 왔다. 이번엔 재빠르게 공을 앞쪽으로 보냈다. 상대의 당황한 표정이 읽혔다. ‘10 대 9’


또다시 랠리가 시작됐다. 공격이 익숙해졌다. 살짝 넘겼지만, 그녀는 받지 못했다. ‘11 대 9’. 세상에. 내가 이겼다. 1승! 오늘 나의 첫 승이자 최고의 승이다! 무음모드가 해제된 듯 비로소 동호회 사람들의 환호 소리가 들렸다. 열기와 환호에 터질 듯한 가슴으로 펜스에 줄줄이 늘어선 구장 사람들과 차례로 손을 부딪쳤다.


옆 탁구대 경기에선 우리 팀이 졌다. 남은 건 오더 1번 언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마지막 경기를 두 동호회 사람들은 목이 터지라 응원하고 있었다. 그녀는 5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역전승을 거뒀다. 동호회 사람들의 함성은 경기장을 가득 채우고도 넘쳤다. 우리가 초심부 우승을 차지했다!


“누나! 경기 봤어요. 라켓 잡은 손을 엄청나게 떠는데 왼손까지 떨던데요. ‘멘탈 나갔구나’ 생각했는데, 경기는 침착하게 잘하더라고요. 진짜 잘했어요.”

“나, 멘탈만 나간 게 아니고 심장까지 나가는 줄 알았어. 숨도 못 쉬겠더라. 고마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도 내 심장은 자리를 못 잡고 요동치고 있었다. 결승 2승 중 1승의 주역이 바로 나였다. ‘기대하지 않은 승’. 서프라이즈 선물이었다.


결승 마지막, 쫄깃하게 역전승한 언니가 말했다.

“옆을 보니 우리가 졌더라고. ‘우승은 안 되겠다.’ 생각했는데, 세상에, 네가 이긴 거야. 나만 이기면 우승이라는 생각에 더 열심히 했어. 고마워”.


그녀의 말에 환하게 웃었지만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다. 언제나 “잘했어”, 괜찮아”를 말하며 나와 함께한 사랑스러운 그녀들, 다정하게 “화이팅”을 외치고 따뜻하게 나를 지켜보는 동호회 사람들. 고마운 그들이 ‘자신감 한 스푼’이란 마법을 내게 뿌렸다. 내 안에 무언가 있었다. 그들의 사랑과 더불어 그것이 온전히 드러나기를 바란다. 기대하지 않았던 경기에서 오롯이 내 몫을 해낸 나를 토닥인다. 잘했어.


사랑스러운 그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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