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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라 Apr 16. 2023

어쩌다 나바론 하늘길

4월 10일 월요일, 급하게 추자도 출장이 잡혔다. 추자도는 행정구역상 제주도에 속하지만, 제주도에서 45km, 해남에서는 35km 떨어진 섬으로 거리로 보자면 전라도에 더 가깝다. 추자도는 상추자와 하추자로 나뉜다. 상추자에는 추자항, 하추자에는 신양항이 있어 제주도나 완도에서 배로 다닐 수 있다. 두 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차로 다닐 수 있고, 순환 버스도 있다. 당일 일정으로 섬에 들어갔다 나오기 위해선 상추자로 들어가는 퀸스타 2호를 타야 하는데 이 배는 규모가 작아 조금만 기상 상황이 나쁘면 출항이 안된다. 급하게 출장이 잡힌 것도 지난주 목요일 배가 뜨지 않아 변경된 거였다.

제주항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아침 9시 30분 상추자로 들어가는 배를 탔다. 배의 울렁거림에 잠을 청하고 한 시간쯤 지나자 추자항에 도착했다. 오전 일정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곳 직원이 말했다. “나가는 배가 4시 40분에 있는데 혹시 운동화 신고 오셨으면 나바론 하늘길이라도 걸어보세요”. ‘추자섬에 웬 나바론?’ 전쟁영화 ‘나바론 요새’를 떠올리게 하는 상추자의 바닷가 가파른 절벽을 나바론 절벽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 바닷가 절벽을 따라 걷는 길이 바로 ‘나바론 하늘길’이었다.

 

일행은 점심을 먹고 하늘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4월 햇볕 쨍한 봄날, 모자가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다들 편안한 복장이었다. 평소 걷는 것을 좋아하고 예전에 오름도 잘 쫓아다녔던 터라 작은 섬 하늘길 정도는 어렵지 않을 터였다. 추자항을 시작으로 추자면사무소를 지나 추자초등학교 둘레길로 들어갔다. 추자초 옆으로 추자체육관을 지나자 경사진 길이 나왔다. 평탄하지 않은 섬은 곳곳에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 도시구획으로 잘 정돈된 시내와는 높이부터 달랐다. 마을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미니 해운대 같은 모래사장이 등장했다. 추자항의 고깃배가 즐비한 어촌마을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곳은 평온한 모래들이 줄지은 추자도의 아름다운 해변, 후포 해안이었다. 그곳을 지나자 ‘나바론 하늘길’ 표지판이 보였다.

 

하늘길은 이름 그대로 위로 올라야 걸을 수 있다. 시작은 계단이었다. 건물 계단보다 훨씬 높아 보이는 가파른 계단이 눈 위로 보였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다리가 뻐근해지고 숨은 가빠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계단 오를 때마다 다리를 손으로 잡고 걸음을 옮겨야 했다. 숨은 헐떡헐떡 호흡도 불규칙해졌다. 일행들은 말로는 힘들다고 했지만 정작 걷는 데는 무리 없어 보였다. 일행 중 한 명은 내 숨소리를 듣고 산소가 부족한지 물어왔다. 탁구를 할 때도 많이 뛰고 숨이 차긴 하지만 결이 달랐다. ‘꾸준히 운동한다고 했는데 이 정도도 못 오르는 거였어’ 생각해보니 내가 오름을 올랐던 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앞서가는 일행에게 물었다. “어느 만큼 왔어요?” “이제 시작이에요.”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이런 질문을 하는 나도 우스웠지만, 각목 같은 뻣뻣한 다리로 걷으며 할딱할딱 짧게 숨을 쉬어 대는 내 심장도 정상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내려올 때도 이 길로 내려오는가요?” “아니요, 내려올 때는 등대가 있는 쪽으로 내려가요.” 역시나 다른 길이었다. 여기서 기다릴 수도 없고 일단 시작했으니 걸어야 했다. 맨 뒤에서 속도를 조절하며 걸었다. 몇십 분쯤 걸었을까, 산 아래에서 보였던 정자가 나왔다. ‘바로 여기였어!’ 상추자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정자는 용이 놀던 물웅덩이라는 뜻의 용둠벙 전망대였다. 그곳에서 속옷까지 젖은 땀을 식히며 맘껏 바람을 쐬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당기는 순간이다.

 

“이제 내려가는 거죠?” ,“아니요. 여기는 전망대고 우리는 건너편에 있는 추자 등대로 갈 거예요. 거기가 정상이라 하추자도 보이고 섬을 잇는 추자교도 보여요.” 예전 하늘길을 걸어본 일행이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했다. ‘그래도 정자까지 왔는데 저 등대까지 가는 것쯤이야.’ 힘을 내어 등대를 향해 출발했다. 눈앞에 나바론 절벽이 보였다. 큰 산을 세로로 잘라 놓은듯한 절벽이었다. 이미 우리는 절벽 위 길,  하늘길을 걷고 있었다. 초반 가파른 계단에 익숙해 져서일까, 이번엔 고른 숨으로 걸다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등대 전망대가 나왔다. 등대에서 내려다본 상추자는 바다의 섬이 아니라 호수마을 같았다. 잔잔한 바다를 가운데 두고 빙그르르 집들이 모여 있었다. 상추자와 하추자를 잇는 추자교와 건너편 하추자도 시원스레 눈에 들어왔다.

 

정상에 올랐으니 가볍게 하산할 일만 남았다. 그런데 하산길 안전표지판 문구가 심상치 않다. ‘당신의 안전은 당신 스스로 책임지셔야 합니다.’ 하산길은 심장 미약한 내게는 아찔한 바들거림의 고행이었다. 안전밧줄을 꼭 잡고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바닥만 보며 한 계단씩 조심히 밟았다. 하늘길 후들거리는 계단을 통과하자 이내 숲길이 나왔고 길은 어느새 마을로 이어졌다.


마을은 부산 감천마을 벽화 거리를 연상케 했다. 좁은 마을 길에 알록달록 벽화들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 있어 작은 골목이 더 아기자기해 보였다. 벽화 마을을 따라 걷다 보니 길은 우리가 출발했던 추자항으로 연결돼 있었다.


상추자섬 한 바퀴를 몇 시간 만에 순례했다는 뿌듯함만으로도 잠깐의 아찔함과 후들거림은 기꺼이 허락하고 남음이었다. 준비된 여행이 주는 설렘과 기다림 대신 잡념에서 벗어난 하늘길 몰입의 기쁨은 예상치 못한 산행이 주는 작은 행복이었다. 짧은 산행은 마음과 다른 신체의 허약함을 마주하게 했고 가쁜 숨소리가 때론 나를 기쁘게 할 수도 있다는 신선한 사실을 말해주었다. 유난히 봄볕이 따사로운 날 자외선이 얼굴 곳곳 스며들었겠지만,  나바론 하늘길은 오늘의 주요 일정 만큼이나 빛나는 조연이었다.


                    

상추자도
나바론 하늘길, 나바론 절벽


상추자도와 하추자도를 잇는 추자교와 벽화마을
추자도(상추자도, 하추자도) 관광안내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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