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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만에 첫 행정실장

실장일지

by 새라

나는 지방교육행정 공무원이다. 제주도교육청 소속기관이면 어디든 발령이 날 수 있고 근무할 수 있다. 2025년 1월 1일 자로 20년 만에 첫 행정실장으로 발령 났다. 내가 기관 이곳저곳을 도는 사이 동기들은 몇 번씩 학교 행정실장을 했건만, 나는 처음이었다. 발령 난 학교는 제주시 구좌읍에 있는 작은 중학교다. 집에서 32.4㎞의 거리다. 출근 시간은 50분, 퇴근 시간은 1시간 조금 넘는다. 하루에 2시간을 이동시간으로 소비한다는 게 아깝긴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지 고민 중이다.


출근 첫날, 시스템 권한을 받고 어수선한 책상을 내 눈에, 손에 맞게 세팅하느라 어찌 시간이 갔는지 모르게 지나갔다. 둘째 날은 학년 말 연례행사인 예술제가 열리는 날이다. “실장님, 예술제 구경 오세요, 우리 아이들이 열심히 준비했어요” 행정실에 온 선생님이 내게 말을 건넸다. 예술제는 학교 옆에 있는 작은 도서관의 공연 무대를 빌려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술제 관련 문서가 결재시스템에 계속 올라오고 있던 터라 궁금해졌다. “네, 가볼게요.”


행사 시간이 다가오자 학교 옆 도서관으로 향했다. ‘몇 층에서 하지?, 가보면 안내가 있겠지’ 학교도, 예술제도, 읍내 도서관도 모든 것이 낯설었다. 자그마한 도서관에 들어서자 선생님들이 리플릿을 나눠주며 안내하고 있었다. 아담한 공연장 객석에는 1학년 석, 2학년 석, 3학년 석, 학부모 석, 교직원 내빈석 등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교직원 석 앞쪽 빈자리에 앉아 예술제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아는 얼굴이라곤 맨 앞줄에 앉은 교장 선생님과 내 옆줄에 앉은 선생님이 전부였다. 조명이 환한 무대와는 달리 객석은 어두웠지만, 계속해서 손에 리플릿을 든 학부모들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시내에 있는 중학교는 예술제를 하는지도 모르는데, 이곳에서는 예술제가 마을 축제나 된 듯 모두가 함께하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객석은 아이들과 학부모로 붐볐고, 작은 공연장은 웅성거림 속에 흥겨움이 퍼지고 있었다. 무대 역시 화려한 조명 덕분에 실제보다도 더 웅장하게 보였다. 이런 자리에 관객으로 앉아 있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났다. 2학년 남학생과 여학생이 사회를 보며 예술제 시작을 알렸다. “다음은 예술제를 축하하는 교장 선생님에 말씀이 있겠습니다.” 교장 선생님이 무대 위 단상으로 올라갔다.


요즘은 교장 선생님이 어떤 훈화를 하는지, 오늘 예술제는 특별하니까 어떤 말을 할지 궁금했다. 그런데 예술제라는 말이 나오는 듯하더니, 곧이어 1.1 일자로 우리 학교 행정실장이 바꿨다는 말이 나왔다. “강❏❍ 행정실장은 앞에 나와서 인사해 주세요” 교장 선생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은 마이크를 타고 공연장에 크게 울려 퍼졌다. 그것도 엉뚱하게 앞뒤가 뒤집어서. ‘아니, 이건 무슨 맥락이지? 내 이름도 거꾸로 말하면서, 사전 시나리오가 있었나? 나만 몰랐나? 그냥 구경하러 오라고 했는데’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이제 무대로 나가야 한다. 더는 생각할 시간이 없다. 잠시 얼떨떨한 기분은 접어두고, 양팔을 머리 위로 올려 손을 흔들며 무대 앞으로 나갔다. 마치 약속된 것처럼. 최대한 자연스럽게.


“안녕하세요, 1월 1일 자로 우리 학교로 발령받은 행정실장 강❍❏입니다.” 또박또박하게 내 이름 말했다. 그리고 간단히 나를 소개하며 인사했다. 마무리를 확실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여러분! 제 이름이 뭐라고요?” ” “” “내가 선창 하자 객석을 채운 아이들이 합창으로 이름을 한 글자씩 큰소리로 외쳤다. 그제야 처음 올라가 본 무대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왔다.


학급별 전체 공연, 댄스부 공연, 밴드 공연, 선생님과 함께하는 무대 등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공들여 연습했는지 생동감 넘치고 힘 있는 무대가 하나둘 연출됐다. 오전 마지막 공연으로 밴드부에서 준비한 ‘붉은 노을’ 음악이 나오자 객석이 있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폴짝폴짝 뛰며 손을 흔들어댔다. 물론 나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일제히 일어난 사람들의 함성과 우렁찬 노랫소리에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다.

공연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옆에 앉은 선생님이 놓칠세라 얼른 한마디 했다. “실장님, 오후 프로그램이 더 재밌어요. 2, 3학년이 하는 거라서요. 오후에도 꼭 보러 오세요” 선생님의 목소리에 뿌듯함과 기대감이 들어있었다. “네, 꼭 다시 올게요” 웃음으로 화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도치 않게 행정실장 2일 차에 전교생과 학부모 앞에서 행정실장임을 확실히 알렸다. 교장 선생님의 큰 그림이었을지도. 어찌 됐든 어떤 맥락이든 난 이 학교가 좋아진다. 아이들의 환호와 열정이 내 몸에 훅 들어온 거 같다. 예술제를 끝으로 기나긴 겨울방학이 시작되겠지만 그사이 난 이 학교의 모든 것을 다 알 계획이다. 그리고 신학기가 시작되는 3월에는 학교와 내가 한 몸인 듯 그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나의 임무를 다해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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