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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실장 첫 프로젝트, 캐비닛 위 장독대를 제거하라!

by 새라

새 아파트에 입주했다. 15년 전에. 그전 살던 빌라보다 넓었고, 새 아파트라 깨끗했다. 그사이 온 집안을 휘 집고 다녔던 꼬마들은 고등학생이 되고 우리 집 구석구석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바닥도, 벽지도, 주방도, 화장실도 온통 손 봐야 할 곳투성이다. 그런데 첫 행정실장으로 발령받은 학교에서 이 기분을 받았다.


행정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왠지 어둡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어두운색의 정체불명의 싱크대 상부장이 양쪽 벽 천장까지 쭉 짜져 있었다. 싱크대로 시선이 갔다. 짧은 다리에 한 칸짜리 조그마한 싱크대였다. 윤기가 사라진 얼룩덜룩한 스테인리스 상판에 반쪽짜리 작은 개수대, 문짝은 고동색 나무껍질 줄무늬 색이었다. 싱크대 옆에 작은 사물함 2개를 나란히 놓고, 그 위에 컵과 주전자, 차 재료, 식기건조기가 있었다. 싱크대 하부장은 한 칸인데, 상부장은 저만치 냉장고가 있는 위치까지 쭉 짜져 있었다. 싱크대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싱크대 맞은편 벽에는 4개의 서류보관용 키 큰 캐비닛이 있었는데, 그 위에도 싱크대 상부장이 천장 높은 줄 모르게 놓여 있었다. 베이지색의 캐비닛 위에 얹혀 있는 고동색 나무껍질 줄무늬 상부장은 그 색깔만큼이나 생뚱맞아 보였다. 마치 캐비닛이 장독대를 머리에 이고 있는 것 같았다.


갑갑했다. 저렇게 많은 수납공간에 도대체 뭐가 들어갔을까? 상부장을 하나씩 열어보았다. 의자를 놓고 물건을 넣어야 하는 높은 위치상 자주 쓰일만한 공간은 아니었다. 종량제 봉투, 하얀 비닐봉지, 알 수 없는 빈 상자와 설명서, 철 지난 책자들, 유물 같은 그릇이며, 컵들. 몇 군데는 그냥 비어있었다. 작은 공간을 더 좁아 보이게 하는 상부장은 사라져도 전혀 불편함이 없을 거 같았다.


기관에는 부서마다 탕비실이 있고 깔끔한 싱크대가 공간에 맞게 구성돼 있다. 사무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은 직원을 위해 복지 차원에서 각종 차 재료도 구비되어있다. 직원들은 쾌적한 분위기에서 필요에 따라 야근도 하며 열심히 일한다. 이런 분위기에 익숙했던 나였을까. 칙칙하고 여기저기서 주워온 듯한 물건들이 눈에 거슬렸다. 세제로 밀어도 때가 지워지지 않는 지저분한 개수대는 유독 더했다.


싱크대를 바꾸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자리에 앉았다. 화면이 잠긴 컴퓨터를 켜는데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그냥 몇 년 있다가 다른 곳으로 발령 나면 그만인 것을 굳이 뭘 정리하려 하는지. 전임자들도 그냥 그렇게 지냈던 것을. 내가 유별난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원들에게 물었다. “제가 처음 와서 그런지 행정실이 좀 답답해 보이네요. 공간을 잘 정리하면 조금 더 여유가 있을 거 같아요. 불필요한 상부장은 철거하고 필요한 만큼만 싱크대를 맞추는 게 어떨까요? 싱크대 대용 서랍장도 치우고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캐비닛 위에 장들은 공간만 답답하게 하고 쓰지도 않는 곳이에요. 싱크대 때는 밀어도 지워지지 않고요. 바꿀 수 있다면 대찬성이에요” 내 제안이 끝나자마자 한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다른 직원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행정실 환경에 집중하고 있는 나를 보니, 학창시절 시험 기간 책상에 앉으면 어지러운 책상 정리부터 했던 생각이 났다. 그때는 책상 정리를 하곤 졸음이 쏟아져 잠이 들었다. 오늘은 책상을 정리했으니 공부는 내일부터 하기로 다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왜냐하면, 난 잠들고 싶지 않고, 일하고 싶으니까. 환경이 밝아지면 그만큼 사무실 분위기도 더 좋아지고 일할 맛 나는 학교가 될 테니까.


이제 예산을 확인해 봐야 한다. 학교는 2월에 회계가 마감되기에 분명히 이곳저곳에서 남은 예산들을 끌어모으면 깔끔한 일자 싱크대 정도는 제작할 수 있을 터였다. 손볼 곳 많은 우리 집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보낼 사무실이 상큼해질 것을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밝아진다. 발령받은 지 겨우 한 달, 싱크대에서 일의 열정과 동력을 얻는다는 게 조금은 엉뚱하지만, 이곳은 이미 내가 일하고 싶은 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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