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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우리 아들!

by 새라

차 안에서 아들을 기다린다. 친절한 제주버스 앱은 아들이 탄 버스가 이전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고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하고, 교복 입은 아이들이 내린다. 그 속에 내가 사랑하는 아들도 있다. 늘 같은 곳에 주차한 차를 보고 자연스럽게 걸어온다. 의젓하고 늠름하다.


아들은 고1이다. 자기가 원한 학교로 진학하다 보니 학교는 제주시에서 한 참 먼 표선면에 있다. 아들과 나는 아침 일찍 함께 집을 나선다. 1시간을 달려 아이를 등교시키고, 차를 돌려 다시 출근한다. 그러다 보니 나의 출근 시간은 배가된다. 수업이 끝나 방과 후와 자율학습이 끝나면 아이는 제주시로 오는 버스를 탄다. 나는 밤마다 집에서 좀 떨어진 정류장으로 가서 버스에서 내리는 아들을 기다린다. 아이를 태우고 돌아오는 길은 아침 출근길보다 훨씬 여유롭고 한가하다.


아이들이 네 살, 여섯 살이던 그 시절, 나는 바빴다. 매일 밤 9시가 넘어 퇴근했고, 주말에도 출근하기 일쑤였다. 급기야 시어머니가 우리 집으로 들어오셨다. 주로 신랑과 시어머니가 번갈아 가면서 아이들을 돌봤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데려오고, 집에 들어가기 전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는 건 대부분 신랑의 몫이었다. 그 덕에 아파트 놀이터에 있던 부모들 사이에서 우리 아이들은 아빠랑 할머니와 사는 아이로 여겨졌다. 놀이터에서 아이들과 함께하지도 못했고, 재롱부리던 아이들의 모습도 눈 속에 많이 담지 못했다. 늦은 귀가 후 잠든 아이들의 포동포동한 볼살을 쓰다듬으며 뽀뽀할 때면, 그 촉감과 향기만으로도 행복했다. 자고 있는 아이들은 내게 천사였고, 하루의 피로를 날려주는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나는 그렇게 따뜻하게 나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정작 아이들에게 내 시간을 온전히 내어주지는 못했다.


화단 풀숲에 민달팽이를 자그마한 손으로 덥석 잡고 ‘엄마! 아빠!’를 외치며 뛰어오던, 뽀송뽀송한 솜털에 말랑말랑한 팔뚝 살을 가진 꼬맹이 아이들은 이제 내 키보다 훌쩍 컸다. 놀이터에서 놀지도 않거니와 혹시나 넘어질까 조마조마하며 옆에서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코 ‘흥’ 풀라며 수건을 목에 두르고 얼굴을 씻겨주지 않아도 되고, 샤워가 끝나 온몸에 로션을 발라주지 않아도 된다. 옷을 챙겨주지 않아도 되고, 엄마표 간식 대신 편의점 간식을 먹는다. 잠이 들 때까지 꼭 엄마가 옆에 있어야 했던 아들은 이제 방문만 두드려도 “엄마! 왜?”라고 묻는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한 저음이다.


주말 아침, 아이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한다. 밥 먹는 아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을 건넨다. “후식으로 블루베리 요거트 먹을래? 엄마가 귤 까줄까?” 잠깐의 고요가 길다. ‘아니’라는 단답형 대답이 돌아올 수 있음을 이미 알고 있다. ‘응’ 아이들의 한마디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식탁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연다. 자그마한 그릇에 요거트를 넣고 그 위에 블루베리를 얻는다. 마무리 토핑으로 살짝 꿀을 뿌린다. 나무스푼과 함께 식탁 한편에 준비해 둔다. 여전히 밥을 먹고 있는 아이들이 사랑스럽다.


아들과 함께하는 출근길이자 등굣길은 아이의 학교생활을 물어볼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관심 없는 듯 이번에 신청한 방과 후 수업에 관해 물어보기도 하고, 공부 이야기도 살짝 곁들이기도 한다. 최대한 아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툭. 오늘도 출근길 아들에게 말을 건넨다. “영어연극 수업은 어떠니?” 조용하다. 거울로 힐끔 뒷자리를 살핀다.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 출발할 때는 보였는데, 아마도 점점 기울더니 뒷자리에 꼬꾸라져 버렸나 보다. 조금 있으면 회전교차로에 방지턱이 나온다. 최대한 흔들림 없이 지나가야겠다. 속도를 줄인다. 도착 3분 전쯤에 아이를 부르면 될까? 아니면 5분. 학교가 다 와 가는 것을 알리듯 도로에 있는 바람개비가 보일 때쯤 아이를 깨워야겠다.


뽀송뽀송한 솜털은 어느새 까슬한 수염으로 바뀌었고, “엄마”를 부르던 아기 목소리는 낮고 단단한 저음으로 되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번개맨'을 외치며 팔을 펴고, 미니카를 굴리며 놀다 “엄마!” 하고 품에 안기던 그때 그대로다. 그 시절, 엄마는 많이 안아주지도, 놀아주지도 못했지. 늘 늦었고, 늘 바빴고, 늘 미안했어. 그래서 지금은, 놓치지 않으려고 해. 등굣길이라도, 잠든 네 옆자리에서라도.


“사랑한다. 우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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