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었다.
눈을 꿈뻑대며 생각한다, 죽고 싶다. 전 재산 삼천만원을 넣어둔 주식이 두 달사이 –50%가 넘었다.
보이스 피싱으로 이천만 원을 잃어 빚까지 생겼다. 희망이 없는데 죽을 용기도 없다.
오피스텔 13층 창문을 열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콘크리트에 떨어지기까지는 약 십 초, 애꿎은 창문을 쾅 닫고 지긋지긋한 삶의 비린내를 지우듯 페브리즈 반 통을 뿌린다.
"야! 김 대리! 오늘이 13일이냐? 날짜 하나 똑바로 못 봐!”
시정하겠습니다. 제발 박 부장이 죽었으면 좋겠다. 13일에서 12일로 파일명을 고친다.
"식사하러 가시죠!" 부장의 소리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첫 번째 화장실 칸에 들어가 쭈그린다. 마지막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탕비실에서 사발면에 물을 붓는다. 밥 먹었니? 엄마의 알람이 울려 인터넷에 제육볶음 이미지를 캡쳐 해 보낸다. 맛있겠네, 답장은 하지 않는다.
맛있는 게 먹고 싶었다. 공짜 육개장, 간장밥 말고 진짜 맛있는 거, 엄마한테 이만 원만 빌려볼까 하다 참는다. 서른 세살이 이만 원도 없냐고 너 서울에서 대체 뭐 하고 사는 거냐는 잔소리나 들을 게 뻔하다.
대문에 집주인의 쪽지가 또 붙었다. ‘내일까지 전화 안 받으면 방 빼는 걸로 압니다. 환장할 노릇이다. 쥐꼬리의 월급으론 대출 이자 막기에도 급급한데다 내일까지 미납된 핸드폰 요금을 내지 않으면 정지된다. 철판을 깔고 몇만 원이라도 빌려보기엔 아직 알량한 자존심이 남아있나보다. 새벽 세 시인데 잠이 오지 않는다.
부장이 사과한다. 자기도 윗선에서 쪼아 어쩔 수 없었다고. 후배들이 다가와 사과한다. 박 부장이 시켜서 어쩔 수 없었다고. 정규직 전환이 안 될까 봐 무서웠다고. 엄마가 전화한다. 로또 1등이 됐다고, 회사 그만두고 내려와서 우리 평생 놀면서 같이 살자고. 마지막으로 어제 못 먹은 덮밥을 먹는다. 이런 게 행복인가.... 따뜻하다....따뜻하다? 어색한 햇빛과 고요한 바깥의 소리… 망했다. 칫솔을 문 채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을 주워 입는다. 대충 쌓아둔 프라이팬이 큰 파열음을 내며 바닥에 나뒹군다.
출근 시간이 훨씬 지나 앉을 자리가 있는 버스 안. 미확인 문자 열건. 집주인 ‘확인했어요~고마워요.’ 도와머니 ‘김민석님 대출금 완납을 축하합니다.’ 서울카드 ‘대금을 완납하셨습니다’
스팸 문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시간은 열 시 반, 도착하면 12시 직전. 이상하게 회사의 연락이 없다. 이 기회에 자르려는 걸까. 회사 단체방에 들어가 본다. 3팀 대리 김민석‘금일 회의 자료 공유 드립니다’3팀 대리 김민석은 난데? 그 밑에 하트가 세 개 눌러져 있다. 그니까 내가 잘렸는데 공교롭게도 동명이인의 김민석 대리가 입사를 해서 나 대신 회의를 한다고?
검지만한 불투명한 창문 사이로 사무실을 훔쳐보려는 순간 부장이 벌떡 일어났다. 점심시간이다. 화장실로 급하게 뛰어 들어가 문을 닫고 쪼그린다.
"오늘 김 대리님 진짜 이상하지 않아? 주말 사이에 사람이 저렇게 밝아질 수가 있는 거냐? 봐봐, 진짜 웃는 얼굴엔 침 못 뱉는 거야 박 부장도 김 대리가 웃으니까 아무 말도 못 하는 거 봐 뭐 로또라도 된 거 아냐? 됐으면 안 나왔겠지, 오늘 회의 자료 봤어?" 엘리베이터가 닫히는 소리에 달칵 문고리를 돌린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아! 깜짝이야!” 코 앞에 사람에게 비명을 지른다, 거울을 보는 듯한 착각, 비명을 삼키기도 전에 남자가 내 입을 막고 칸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김민석 씨? 믿든 안 믿든 상관없고 빨리 말할게요. 난 당신의 도플갱어예요. 뭐 어떻게 찾아왔는지는 묻지 마요 어차피 이해 못 하니까. 당신 사는 게 뭐 좀 거지 같달까, 그래서 당신을 좀 도우라는 명령? 되묻지 마세요. 어차피 이해 못 해요. 앞으로 100일간 당신이 벌여 놓은 일 좀 수습할게요. 그러니까 석 달만 쥐 죽은 듯 사세요. 당신 채무도 일단 수습 해놨으니까 당신은 내 동선과 겹치지만 않으면 돼요. 알겠어요?”
누가 대신 출근 좀 해줬으면 이런 멍청이 같은 망상이 현실이라고? 엄지손톱 위를 꾹 누른다. 꿈은 아닌데. 검은 모자와 마스크를 건네받는다. 남자가 날 째려보며 손을 탈탈 턴다.
“아, 손톱 좀, 오늘 누구와 전화했는지 어떤 문자들을 주고받았는지는 당신 핸드폰이랑 메일에서 보이니까 확인하시고. 내가 수습한 거에 똥 싸지르지 말고 당신은 최대한 의심받지 않게, 이해하죠? 내가 먼저 나갈 테니까 오 분 뒤에 마스크 쓰고 집에 가세요.” 말을 끝으로 남자가 나간다. 상황 파악을 해본다. 평행우주는 말도안되고, 흥신소에서 닮은 사람을 찾은 건가? 모자를 눌러쓰고 지하철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한참 쳐다본다. 새로운 피싱 방법인가. 나 또 사기당하고 있나. 제일 그럴듯한 추측이다.
설마 대출받은 거 아니야? 은행 어플을 급하게 켠다. 주식 –55%, 대출금 없음, 통장엔 삼백만 원이 들어있다. 역시 사기꾼들한테 말려든 것 같다.
잠깐, 집에 가면 안 되잖아? 만약 박 부장을 때리면? 머리를 쥐어 박는다. 두 시 사십오 분. 다시 출발하기엔 애매한 시간이다.
엄마의 메시지를 확인한다. 점심에 김 씨가 먹은 듯한 닭볶음탕, 여긴 1인 식사가 안 되는데, 그럼 팀원들이랑 같이 먹었다고? 말도 안 돼, 엄마의 맛있겠네^^ 답장에 김 씨가 엄마는 뭐 먹었어? 답장을 보냈다. 엄마의 조촐한 식사 사진이 보인다. 편의점 김밥과 집에서 싸간 몇 점의 김치. 김 씨는 한 발 더 나가 오만 원을 송금하며 맛있는 거 먹어요. 내가 평생 해본 적 없는 말을 다 한다. 도플갱어라면서, 내 원래 성격과 완전 딴판이다. 분명 사기꾼이다. 갑자기 울리는 알람에 화들짝 놀란다.
‘금일 녹취 및 중요 사건 업데이트, 이메일 확인 –dp-
녹취 파일과 워드 파일. 8:32 출근, 11:01 팀 회의, 12:14 점심 닭볶음탕(팀) 13:24 한보배 부장한테 깨짐 2:45 ….디테일하다. 팀원들이랑 밥을 먹었다고?
"제가 집안에 일이 있어서 근래 좀 어두웠어요. 다 잘 해결돼서 괜찮아졌습니다. 부장님! 이제 진짜 정신 차리고 해보겠습니다. 오늘 점심은 닭볶음탕 어떠세요!”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리며 녹음이 끊긴다.
"네가 돈이 어딨다고, 너 맛있는 거 사 먹지. 엄마는 괜찮아"
"엄마, 편의점 음식 먹지 말고 식당 가서 먹어요 엄마 회사 옆에도 맛있는 거 많잖아. 거기 옆에 한식관 냉면 진짜 맛있대 내일은 그거 먹어요"
"어…. 그래그래 먹어볼게 아들, 고마워~"
큰일이다. 내 말투도 아닐뿐더러, 나는 엄마의 회사가 가래동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가본 적도 없는 동네의 맛집을 꿰고 있는 가짜라니. 메일에 답장을 쓴다.
‘지금 저한테 사기 치시는 것 같은데, 빚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먼저 갚아 주신 건 제가 최대한 빨리 드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안 될까요? 그리고 제 말투랑 완전 달라요, 전 회사에서 아무하고도 스몰 토크 안 해요. 엄마 회사도 어딘지 모르고요. 제발 목적을 좀 말해주시고 타협을 먼저 해보시죠. 제가 최대한 다 맞출 테니까 엄마는 제발 건들지 말아주세요.’
메일을 보내자마자 답이 온다. ‘주소가 잘못되었습니다’ 신상 노출은 안 하겠다는 거지.
미어터지는 버스에 꾸역꾸역 몸을 밀어 넣었다. 빌딩들이 깜지처럼 즐비한 거리, 출근 시간의 열기 속에서 검은 모자와 마스크를 쓴 채 가만히 서 있는 건 곤욕이었다. 빌딩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들의 의심 섞인 시선이 수십 번을 스쳐 갔을 때쯤, 남들에 비해 유난히 긴 팔과 짧은 다리, 그리고 일주일 내내 메고 다니던 적갈색 크로스백이 보였다. 나, 아니, 김 씨였다.
이 꼴로 달리기라도 하면 정말 괴한으로 보일까 봐 조심스레 옆으로 다가갔다.
“민석 씨? 저 민석이요.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서, 한 삼십 분은 남았는데 잠깐만 이야기해요.” 딱 붙어 벽으로 조금씩 밀어붙였다.
"아는 척하지 말라니까."
"마스크 썼잖아요. 잠시만 이야기해요"
"체형부터가 똑같구만 뭘" 그쪽도 별명이 긴팔원숭이예요? 말을 참는다.
"아니 제가 그쪽한테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메일 주소도 아니던데"
"연락을 왜 해요. 중요한 건 내가 다 보내줬잖아요."
"저랑 완전히 다르다니까요. 그게 문제가 아니고, 저 지금 그쪽이 이해가 안 가는데 이게 외계 행성 뭐 이런 거일 리는 없고 가면이에요? 이걸 믿어야 하는 게 이해가 안 가잖아요. 똑같이 생기긴 했지만 성격도 완전 다른 것 같고 상식, 그니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거죠. 혹시 돈 받으러 오신 거면 진짜 최대한 빨리 드릴 테니까 뭘 원하시는지 좀 알려주세요."
“말해도 이해 못 한다니까. 저랑 똑같이 생긴 사람 인생이 개 같다잖아요. 딱 백일 도와주러 뭐 임무를 받았다고 해두죠. 먼저 갑니다. 저도 중간에 관두진 못하니까 그런 걱정은 마시고 누가 대신 귀찮은 일 처리 해주나보다 하세요.”
마스크를 쓰고 고개를 휙 휙 돌리자 출근 중인 사람들이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친다. 인터넷으로 도플갱어 피싱을 검색해도 소용 없다. 경찰서라도 전화해 이런 보이스 피싱도 있냐 묻고 싶지만 미친놈으로 보겠지. 이제 갚을 빚도 없고 통장에 삼백만 원이나 있다. 월급날 빼곤 이 금액을 언제 봤더라. 이 돈을 쓰면 정말 잡혀가지 않을까, 월급은 내 거 맞나? 김 씨가 받아 가면 곤란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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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다 박 부장님 덕분인걸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 계약만 잘 되면 저도 차장 달 수 있는 겁니까?”
[8:32 출근, 12:14 구내식당][특이사항: 엄마랑 7시 이후에만 연락할 것. 절대로 끼어들지 마. 월급은 네 거야]
사람들은 박 부장 비위나 맞추던 비겁한 김민석보다, 시원하게 웃으며 할 말 다 하는 저 가짜를 더 반기는 눈치였다. 마지막 줄에 얹혀있던 게 쑥 내려간다. 몇 달 만에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킨 뒤 엄마와의 연락을 본다. 통화 두 건, 엄마의 오늘 점심이 보인다.‘복국 잘 먹었네’ 내가 사준 건 아니지만 흐뭇하다. 병원은 갔으려나, 아직 여섯 시 삼십 분이다.‘약은 먹었어? 몸은 좀 어때,’김 씨가 엄마한테 보내는 연락을 확인한 후 핸드폰을 끈다. 문 앞에 배달된 짜장면과 탕수육을 구석에 박아놓았던 캐리어 위에 펼친다. 내일 뭐 할지 생각해 본 적이 언제더라. 돈도 시간도 많으면 뭘 하고 싶었더라.
평일 오전 열한 시에 환기를 시킨다. 붐비던 거리가 한산하다. 여행을 좀 가볼까. 고등학교 수학여행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갔던 제주도 티켓을 찾아본다. 비싸다. 주제에 여행은 무슨, 친구들이 가자 해도 난 여행 싫어한다며 칼같이 거절했는데, 돈이 없었던 거지만.
악! 갑자기 오른쪽 얼굴이 찢어지는 느낌이다. 손바닥으로 볼을 잡고 신음소리를 내며 일어나 거울을 본다. 관자놀이부터 턱까지 쓸린 상처가 보인다. 신체도 공유되는 건가? 빨간 스크래치들 사이 피가 새어 나온다.
‘점심은 쉬고 저녁 먹으려고 독감이 아직 안 나았나 봐, 입맛이 없네’
‘몸보신으로 삼계탕 어때요? 내가 갈게’
‘정말?’ 재빠르게 답장한다. ‘오늘은 못 가고 다음에’‘응 갈게’ 김 씨의 연락과 겹쳐버린다. 5초의 정적이 흐르고 ‘응 이따 갈게’ 한 번 더 전송된다.
전화가 울린다. ‘엄마’ 이내 통화 중으로 넘어간다. 될 대로 돼라, 오랜만에 만나서 밥도 같이 먹겠네. 저 다정한 아들이 내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게 소름 끼치면서도 엄마가 저 가짜를 진짜 나라고 믿으며 행복해했으면 좋겠다는 비겁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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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어들지 말라고, 네가 내 프로젝트 망치고 있음, 제발 닥칠 것**
"아들! 점심 다 먹었어? 오늘 오는 거 진짜야?”
"그럼~ 가야지"
"무리해서 오진 말고, 몇 시쯤 도착해?" 오랜만에 듣는 기분 좋은 말투다.
“아들이 이렇게 챙겨주는 게 얼마 만이야"
그래, 알아서 잘해봐라. 사회성은 나보다 훨씬 나은 건 사실이니까. 편의점에 가서 맥주를 잔뜩 사와 냉장고에 채워 넣는다. 김빠진 맥주를 아껴먹는 거 말고 시원한 맥주를 따서 마시는 목줄기의 따끔함. 며칠 쉬었다고 몸이 찌뿌둥하다. 편두통이 도져 타이레놀을 두 알 삼킨다.
백화점 일 층 향수 냄새 사이로 엄마가 예전에 쓰던 화장품 브랜드를 발견한다. 아직도 이걸 쓰려나. 세트로 구성된 박스를 본다. 33만 원, 비싸다.
"50대 여자들이 제일 많이 쓰는 게 뭐예요?" 직원이 33만 원짜리 세트가 제일 잘 나간다고 한다. 제일 가운데 들어있는 크림은 얼마냐고 묻는다. 30ml에 팔만 원 50ml에 십사만 원, 세트 말고 크림만 30ml로 달라고 한다. 엄마가 여기 화장품을 더 이상 안 쓸 수도 있으니까. 여성 머플러도 둘러본다. 엄마가 머플러를 쓰던가? 괜찮아 보이는 베이지 머플러를 들어 택을 본다. 이십칠만 원, 못 본 척 내려둔다.
팔 안쪽에 찌릿한 느낌이 든다. 깜짝 놀라 벌레를 떼듯 툭툭 턴다. 김 씨 또 뭔 짓을 한 거야. 팔 전체가 욱신거린다.
티비상위권에 있는 외국 영화를 튼다. [네추럴리] 사고를 당해 갑작스레 한쪽 팔과 다리를 잃은 사람 케인. 그의 지인들과 심지어 모르는 이웃들까지 주인공을 행복하게 해주려 케인의 병실에 24시간 교대로 붙어있다. 케인은 유명한 미용사였는데 이젠 미용의 꿈을 접어야만 하는 현실에 죽고 싶어 한다. 모두가 케인의 새로운 꿈을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케인은 매우 히스테릭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따뜻함에 점점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나아지기 위해 노력한다.
난 이런 말도 안 되는 희망이 담긴 스토리가 싫다. 나를 백 프로 이해해 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모두 남이 망가져 가는 게 즐거울걸? 내가 쟤보단 낫다고 생각하면서. 평점 4.8. 당신이 케인이었다면 다시 열심히 살아볼 의지가 생겼을까? 아닐 거면서, 자기도 저런 이웃이 되고 싶단다. 웃기고 있네.
박 부장 면상을 보지 않는 것으로도 죽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 사라진다니. 이 참에 이직을 준비해 볼까. 간만에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나에게 약간의 위화감이 든다. 술이 들어가서 그런가, 나도 뭔가 잘 해볼 수 있는 기분이다.
김 씨가 대신 살아주는 생활이 보름이 지났다. 거울을 자세히 들여보게 되는 법,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열고 침구를 정리하는 법, 옷장을 들여다보고 계절에 맞는 옷이 얼마나 있는지, 버려야 할 것과 입을 것을 분리하는 법, 이 간단한 걸 안 했다니. 핸드폰엔 디데이를 설정했다. 뭐라고 설정할지 도저히 생각이 안 나 김 씨 가는 날 로 설정해 두었다. 마이너스 60퍼센트까지 찍던 주식을 하나둘씩 손절 했다. 청약이라는 걸 처음 만들어봤다. 한 달에 오만 원. 빚이 없으니 쥐꼬리 월급으로도 할 수 있는 게 많았다. 먹고 싶으면 먹고, 사고 싶은 걸 하나씩 사고. 남지는 않았지만 모자라지도 않았다. 김 씨는 이제 완전히 적응한 것으로 보였다. 팀원에게 먼저 커피 드실 분? 이라는 메시지도 보내는 지경이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엄마에게 점심을 공유했다. 엄마는 밝아진 아들이 좋은지 말이 많아졌다. 하루에 한두 개 주고받던 연락이 김 씨와는 서른 개도 넘게 주고받았으니까. 물론 7시 이후에는 답장이 잘 오지 않았겠지만.
미루고 미루던 작은 책상을 사고 수저 세트도 샀다. 30대에 와서야 사람답게 사는 걸 하나씩 배워가는 게 우습다고도 생각했지만 나도 취향이란 게 있었구나. 만성 편두통이 심해진다. 동네 이비인후과에선 스트레스의 탓인 것 같다고 했다. 약을 먹어도 차도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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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도 귀찮은지 파일이 빠진 날들이 많았다. 내 인생이 재미하나 없는 걸 눈치챈 거겠지.
"잘한다 잘한다 해줬더니,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 김 대리 너 때문에 계약 못 따면 책임질 거야!" 익숙한 박 부장의 소리다. 김 대리면 김 씨? 박 부장의 히스테리일까 내 잘못일까 겁이 난다.
9:12 출근(지각) 2:52 외출 3:32 복귀
짧아도 너무 짧다. 지각은 뭐고 외출은 뭐고 복귀는 뭐야? 메일을 수차례 올렸다 내려봐도 특이 사항이 보이지 않는다. 회사 단체 메시지창은 별일 없고, 엄마와 나눈 메시지가 없다. 통화 기록을 살펴보니 1:21분에 5분의 전화가 끝이다. 그럼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까? 7시는 넘었지만 남겨진 메시지가 없으니 무슨 일 있냐고 물을 수도 없고. 덜컥 겁이 난다. 엄마의 얼굴과 응급실이 오버랩된다. 엄마 회사 근처 대학병원에 전화해 묻는다. 응급실에 김영숙 씨 있나요? 68년생인데….
엄마는 없었다. 째지는 듯한 이명과 두통으로 자리에 주저앉는다. 새벽 다섯 시, 메시지창을 계속 열어놔도 오가는 메시지가 없었다. 큰 대학병원 두 곳에 더 연락해 봤지만 68년생 김영숙은 없다고 했다. 회사 앞 편의점에 앉아 김 씨를 기다렸다. 회사로 들어가는 박 부장의 뒷모습을 보았을 땐 아홉 시 오 분 전이었다. 김 씨가 출근하지 않았다. 둔탁한 무언가가 머리를 딩 울리는 듯했다. 나보다 완벽하게 내 인생을 연기하던 그놈이, 사실은 엄마를 해치려 온 괴물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밀려왔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나랑 똑같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엄마를 죽인 것 같다고?
새하얀 머리로 거리에 나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받지 않는 엄마에게 계속 전화를 건다.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쓸 새 없다.
"민석아…. 민석아…." 엄마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웅얼댔다.
"엄마? 왜 전화를 안 받아! 어디 있었어 왜....왜....." 손을 휘저어봐도 잡히지 않았다.
꿈이었을까. 주르륵 흐른 눈물을 닦아낼 새도 없이 핸드폰을 찾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가짜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노트북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 십 분.
핸드폰, 침대를 뒤엎고 가방을 탈탈 털어도 보이지 않았다. 미친놈처럼 부엌 찬장을 쾅쾅거리며 열어젖히다, 결국 차가운 냉장고 구석에서 핸드폰을 찾아냈다. 전원이 나간 채 얼음장 같은 기계를 이불 속에 넣고 드라이기 열풍을 쏘아댔다.
화면이 켜지자 '김 씨 가는 날 D-86'이라는 글자가 떴다. 어제 날짜였다. 오늘 아침 8시, 엄마가 보낸 제육볶음 사진이 보였다. '보내줄까?'라는 물음에 김 씨는 '응, 조금만, 고마워' 라고 답해두었다. 내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다정한 아들의 대화였다.
더는 못 믿겠다. 내 인생, 내가 망치더라도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만 빠지라고 말해야 했다. 모자와 마스크를 눌러쓰고 회사로 달려갔다.
“저....김민석씨 계신가요?” 나를 본 김 씨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튀어나왔다.
"뭐 하는 거야?" 김 씨가 내 팔을 붙잡고 구석으로 끌고 간다.
"내가 당신을 왜 믿었는진 모르겠는데 뭐 잠깐 대가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제 인생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빠져주세요"
"갑자기 뭔 개소리야, 빨리 집으로 꺼져 미쳤어?" 소리는 지르지 못하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예, 제가 미쳤었나 봐요. 핸드폰 주세요. 제 핸드폰 어떻게 해킹했는진 모르겠는데 빨리 내놔요. 당신 못 믿겠으니까" 김 씨의 앞주머니에 나와 같은 핸드폰을 뺏으려 달려들지만 김 씨가 재빨리 막는다. 그리곤 내 팔을 잡고 비상계단으로 끌고 간다.
"잘 들어, 여기서 그만하면 너고 나고 네 엄마고 다 죽는 거야 알겠어?"
"협박하시는 거예요? 경찰에 신고해요?" 김 씨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로 신고할 건데, 난 이 프로젝트 똑바로 성공 못 시키면 죽어, 말 그대로 죽는다고. 백일 딱 백일이야. 86일 남았어. 이거 못 채우면 너, 나, 네 엄마 셋 다 죽어. 내가 죽이는 게 아니라 죽는 거라고. 너 오락가락 하는 건 알겠는데 내 말 들어. 부탁하는 거야 협박이 아니라. 말해도 이해 못 하니까 제발 더 묻지 말고 남은 86일 네 멋대로 살아" 그의 눈빛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삶을 망치려는 멍청한 놈을 보는 멸시와 짜증이 섞여 있었다. 나도 죽고 김 씨도 죽고 엄마도 죽는다.... 어차피 이해 못 한다는 말을 열 번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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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한다 잘한다 해줬더니, 일을 이따위로 처리해? 김 대리 너 때문에 계약 못 따면 책임질 거야!”
파일을 연다. 9:12 출근(지각) 2:52 외출 3:32 복귀
오늘이 어제인 게 진짜라고? 아니, 내가 뭐라는지도 모르겠다. 외출은 나를 만난 시간인 건 알겠다. 역시 특이 사항은 없다. 변한 건 엄마와의 연락이다. 점심 메뉴는 코다리찜, 그럼 5분의 통화는 별 의미 없는 연락이었던 걸까. 오후 7시가 되길 기다린다. ‘엄마 별 일 없었지?’ 연락을 보낸다. 전화가 울리지만 받을 용기는 없다. 통화가 끊기기를 기다린다. ‘아들, 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시간을 허비했다. 하루 한 끼 라면을 먹었고 누워있었다. 몸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손절했던 주식들이 하루 사이 20% 넘게 올라왔다. 다신 주식을 쳐다도 안 보겠다 했지만 그 광경을 보니 속이 쓰려 다시 샀다. 내가 사자마자 뚝뚝 떨어졌다. 남은 이백만 원마저 잃는다. 등신같은 새끼, 거울 속 퀭한 나를 보며 말을 건넸다. 김 씨는 내 인생을 고쳐 쓰고 있는데, 나는 다시 그 인생에 똥물을 뿌리고 있었다.
김 씨의 메일을 읽지 않았다. 김 씨도 질렸을 것이다. 김 씨 가는 날 D-84,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16일 만에 또 들었다. 회사만 안 가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구석에 박아뒀던 우울증 약을 뜯어 먹는다.
금일 녹취 및 중요 사건 업데이트, 이메일 확인 –dp-
**우울증약 시간 정해서 먹어 중구난방으로 먹지 말고**
**엄마 생일이라고 보냈잖아. 왜 연락을 안 해**
뭔가 잊은 것 같더라니. 건너뛴 메일을 본다. [내일 엄마 생일, 화장품 떨어졌다고 하심, 7시 이후에 이 링크 전달할 것, 아침에 생신 축하한다고 했는데 문자 보내면서 네가 한 번 더 해]
링크를 확인하니 내가 살까 말까 고민하다 크림만 샀던 화장품 세트의 결제 내역과 갈색에 심플한 명품 로고가 있는 머플러가 보인다. 김씨가 고른 걸까. 어제 나눈 문자 내역을 확인한다. 오전 8시에 시작된 김 씨의 생일 축하 문자부터 점심 사진, ‘내가 가서 미역국 끓여줄까,’ 다정한 아들의 문자. 진짜 아들인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던 엄마의 생일을, 저 가짜는 완벽하게 챙기고 있었다. '너는 쓰레기만도 못한 놈이야.'김 씨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타이레놀 두 알을 털어먹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보름이 더 지났다. 무기력은 늪처럼 깊어져 이제는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먹지도 씻지도 않은 채, 시체처럼 누워 채널 23번에 고정된 티비만 쳐다봤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고, 김 씨의 메일도 열어보지 않았다. 지난주 아빠 제사도 분명 김씨가 지내고 왔을 것이다.내가 버린 인생을 저놈이 너무나 완벽하게 주워쓰고있어서 이제는 이 방구석만이 온전한 내 세상 같았다. 적어도 내 세상에서는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덜컹거리는 문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또 윗집 형이 술에 취해 집을 헷갈린 모양이었다. 아랫집에서 난리를 칠까 봐 문을 살짝 연 순간, 초췌해진 김 씨가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놈은 급하게 문을 잠그고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안녕”
"안녕? 안녕이라고?"
욕을 내뱉는대도 그러려니 할 것이다. 김 씨의 프로젝트를 내가 망치고 있는 건 사실이니까. 김 씨는 주말 예능이 흘러나오는 티비 코드를 뽑고 핸드폰 어딨어, 물었지만 어깨를 으쓱한다. 나도 정말 모르니까. 쇼파 옆 쌓인 맥주캔 더미를 발로 걷어차며 큰 소리가 울린다. 이불과 베개를 던지고 파헤친다. 틈에서 핸드폰이 나온다. 달칵달칵 눌러보고 꽂혀있는 충전기를 연결한다. 거칠게 노트북을 연다.
“읽어”
“싫어” 내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김 씨의 주먹이 날아와 내 얼굴에 꽂혔다. 얼떨떨한 통증이 느껴지는 순간, 김 씨의 입술 옆도 똑같이 터져 피가 흘렀다.
“읽으라고.” 뒷목을 잡고 의자에 앉힌다.
**굶지 마, 내가 아무리 먹어도 네가 굶으면 소용없어**
**빈속에 약 먹지 마, 술에 약도 먹지 마, 속 쓰리니까. 나 회사에 있을 때 술 쳐먹지 마. 협조 좀 해**
내가 스스로를 포기하고 쓰레기처럼 굴 때도, 저놈은 나 대신 내 몸을 걱정하고 내 인생을 고쳐 쓰고 있었다.
*너 메일 읽고 있는 거야? 읽고 있으면 11시 30분에 엄마한테 뭐 하고 있어? 라고 보내*
*너 안 읽고 있는 거지?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말라가냐고 묻잖아. 회사 프로젝트 마감 미뤄졌어 100일 이후야. 뭔지 알아야 회사를 이어서 나올 거 아냐. 진짜 빨리 읽어라. 너 책임감 없는 건 나도 백 퍼센트 파악했다만 다 떠먹여 주고 있는데도 이럴 거야? 다 죽는다고 다! 너 때문에!*
**너 진짜 최악이다. 아버지 제사는 올 거지? 연차 냈으니까 시간 맞춰서 집으로 가. 손톱 작작 물어뜯어 피 뚝뚝 떨어지게 하지 말고**
**7시 을계병원 응급실로, 안으로 쭉 들어와 모자 마스크 꼭 쓰고**
당황한 눈으로 김 씨를 올려다본다.
"엄마가 걱정이 되긴 하냐 이제?" 김 씨가 입고 있던 옷을 하나씩 벗는다. 후드티를 벗자 반팔티 차림의 김 씨가 양쪽 팔을 들이민다.
"이 피멍, 고름, 흉터... 이거 왜 생겼을 것 같아? 네가 말해 봐."
"모르지, 나도. 나 대신 살아줘서 무슨 보상을 받으려는 건지는 몰라도, 그냥 알아서 잘 지내다가 백 일 채우고 조용히 갔으면 좋겠는데."
마치 남의 일처럼 툭 내뱉었다. 내 비아냥에 김 씨가 결국 폭발했다.
"그냥 좀 인간답게, 사람답게 백 일이라도 살아보라고! 힘든 건 내가 다 해주고 있잖아. 근데 넌 왜 네 인생 하나를 똑바로 못 살아? 좋아하는 거 사고, 맛있는 거 먹고, 여행도 좀 가보고! 그게 그렇게 어려워? 약 제때 챙겨 먹고, 제발 지긋지긋한 커튼 좀 젖히고! 넌 네 엄마 생각한다며? 내가 지금 네 대신 그 노릇 다 해주고 있잖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다 보여주고 알려주고 있잖아!"
쏟아내는 김 씨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시처럼 박혔다. 저 가짜는 내가 '개 같다'며 내팽개친 하루하루를 지키기 위해 저토록 처절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가 내 핸드폰을 익숙하게 만지더니 내 앞으로 던졌다. 화면에는 D-19라는 숫자가 선명했다.
"위에서 내려온 결정이야. 더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했나 봐. 그래서 내가 온 거고."
"가망이 없어? 그쪽이 지겨워서 도망치고 싶은 거 아니고? 예상했어. 나 같아도 내 인생 대리하는 거 재미없어서 못 하겠다. 그니까 그만하자고 했을 때 그냥 가지 그랬어."
내가 포기한 나를 포기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저 가짜가 미치도록 부러워서, 일부러 더 날카로운 말을 골라 뱉었다. 김 씨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나를 뚫어질 듯 노려봤다.
"개소리 집어치우고 똑바로 들어. 넌 사실 나야. 도플갱어니 평행우주니 그딴 게 아니라고. 넌 12월 13일에 네 자취방에서 떨어졌어. 투신했다고. 운도 없지, 죽지도 못하고 온몸이 다 으스러진 채로. 넌 지금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누워 있어. 내가 찾아온 그날부터 지금까지."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렸다.
"의사는 가망 없으니까 마음의 준비하래, 근데 네 엄마가 널 포기 안 하더라. 너도 삶을 붙잡고 있었고.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넌 지금 점점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어. 이 디데이는 네가 죽는 날이야. 넌 선택해야 해. 19일 뒤에 그냥 포기할 건지, 아니면 다시 네 몸으로 돌아가 살아볼 건지."
김 씨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꼬라지 보면 그냥 죽는 게 낫겠다 싶겠지만, 네 엄마는 널 살릴 수만 있다면 뭐든 할 기세야. 네가 죽으면 엄마도 따라 죽을 거야. 백 퍼센트. 너랑 나, 엄마까지 셋 다 죽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제 알겠어? 다시 살기로 마음먹어도 고통스러울 거야. 뼈는 다 부서졌으니 평생 장애를 가질 수도 있고, 깨어나면 그 지긋지긋한 빚도 그대로겠지. 바뀐 건 아무것도 없어. 그래도 난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난 네 미래가 아니야. 그저 네 인생이 어떻게든 이어지길 바라는 네 의지일 뿐이지. 이제 시간이 없어. 을제병원으로 가. 김지민 사촌이라고 하면 들여보내 줄 거야. 거기, 네가 있어.“
김 씨가 무심하게 모자와 마스크를 건넸다. 그것들을 받아 쥐는 순간 깨달았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그 지독한 두통과 온몸이 쑤시는 감각은 환상이 아니었다.
"면회 왔는데요. 김지민이요"
김지민, 김지민... 낯선 이름을 되뇌며 옆 침대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에 흰 붕대를 칭칭 감고 호흡기에 매달린 남자. 영락없는 나였다.
삐- 삐-모니터에서 나는 규칙적인 소음이 요즘 들어 자주 들리던 이명과 똑같았다. '김민석, 남, 32세'. 내 몸에는 셀 수도 없는 줄들이 엉켜 있었다. 두 눈을 감은 채 죽은 듯 누워 있는 저 고기 덩어리가 정말 나일까. 저벅거리는 발소리에 놀라 옆 침대 쪽으로 몸을 숨겼다.
거기에 엄마가 있었다. 침대 끝에 매달려 한 줌도 안 되게 쪼그라든 엄마. 엄마는 습관처럼 내 손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민석아, 이제 일어나야지... 이제 그만 자고 가자..."
"누구세요?"
옆 침대 보호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푹 숙이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문이 닫히는 틈새로 마지막까지 나를 보았다. 각종 기계에 매달린 고깃 덩어리, 그리고 그걸 상하지 않게 지키려 애쓰는 작은 사람. 나는 케인이였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 같은 것도 자식이라고 끝끝내 손을 놓지 못하는 엄마가 너무 불쌍해서.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그 모습을 보고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빨리 놓아주지, 나 같은 거 그냥 버리지. 그런 못난 생각이나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김 씨는 없었다. 대신 책상 위에 커다란 수첩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란 포스트잇 한 장이 붙은 채로.
[네 인생 마지막 19일이야. 아직 살 용기 없지? 어차피 곧 죽을 건데 앞날이 무슨 상관이야.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봐.]
수첩엔 내가 잊고 살았던 '김민석'의 조각들이 가득했다. 펭귄 캐릭터 인형을 안고 브이를 그리던 어린 시절, 엄마 아빠의 젊은 날이 담긴 흔들린 사진, 친구들과 어깨동무하고 웃던 대학 졸업식... 내가 살던 동네의 놀이터 풍경까지.
가짜인 김 씨는 내가 쓰레기처럼 버려둔 추억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기록해 두었다. 나조차 잊어버린 내 빛나던 순간들을 저놈은 어디서 다 찾아낸 걸까. 어릴 적 나는 꿈이 참 많았다. 대통령도, 가수도, 멋진 회사원도 다 하고 싶어서 장래 희망 칸이 부족하다고 투덜댔던 기억이 났다. 그런데 서른세 살의 김민석이 마지막으로 꿨던 꿈은 고작 '눈에 띄지 않기'였다. 픽,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수첩의 맨 마지막 장, 김 씨가 남긴 마지막 문장이 보였다.
‘끝내도 돼, 그게 너의 마지막 선택이라면, 아무도 널 비난할 수는 없는 거야.’
맘이 요동친다. 살고 싶어진 건 아니다. 19일만 잘, 아주 잘 살다 가기. 이게 내 마지막 꿈이다.
굴러다니는 에이포 용지를 주워 버킷리스트라고 크게 쓴다. 회사 앞 대창 덮밥 먹기, 어릴 때 좋아했던 펭귄 애니메이션 보기, 로봇 장난감 조립하기. 아빠한테 다녀오기, 카페 가서 혼자 케이크 시켜 먹어보기. 써 보니 참 보잘것없는 소원들이었다. 로봇을 사러 장난감 마트에 가 옆에 있는 퍼즐도 산다. 2시간을 기다려 대창 덮밥을 먹는다. 생각보다 별로다. 전광판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를 본다 ‘겨울 필수 시청 네추럴리 재개봉’ 다시 봐도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였다. 하지만 케인의 표정이 지난날의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서 코를 훌쩍인다. 행복해진 케인의 표정을 보며 어두운 영화관에서 나도 슬쩍 입꼬리를 따라 올려보았다.
D-3, 정말 끝이 나고 있는 게 실감 난다. 책상 위에 크게 자리 잡은 로봇에 수북이 쌓인 먼지도 닦지 못했고 삼분의 일도 못 맞춘 퍼즐이 지저분하게 널려있다. 퍼즐은 내 취향이 아니었다. 하루에 반은 고통에 몸부림친다. 뼈가 비틀리는 고통, 깨질 것 같은 머리, 일어서있으면 다리에 힘이 자꾸 풀려 주저앉았다. 아주 천천히 걸어 병원으로 간다. 김지민 가족이요, 내 침대 쪽으로 절뚝이며 향한다. 미라같이 칭칭 감은 붕대, 힘겹게 쉬는 숨, 대롱대롱 매달린 생명줄, 삐-삐- 반복적으로 들리는 비프음이 듣기 싫어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간다.
엄마를 맞닥뜨려 벽으로 딱 붙는다. 훨씬 더 쪼그라든 엄마, 의사는 이젠 더 못 버틸 것 같다했고 엄마는 대답 없이 그냥 울었다. 좁은 복도엔 작은 사람의 울부짖음만이 메아리쳤다.
아빠의 유골함 앞에 서니 실감이 났다. 나도 저렇게 작은 유리병에 담아지겠지. 작은 창을 만지작대며 속으로 곧 만나자 말을 했다.
D-1, 더 빨리 끝내고 싶었다. 뼈마디를 바늘로 찌르는 고통은 진통제로도 어쩌지 못했다. 김 씨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나와 똑같은 고통을 견디고 있을까. 그럼 엄마 혼자 외롭겠네. 핸드폰의 잠금을 푸는 데만 오 분이 걸렸다. 김 씨의 이전과 다른 딱딱한 말투가 눈에 띄었다. 이건 고통 때문일지, 엄마의 충격을 덜어주려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도어락이 천천히 눌리고 피골이 상접한 채 절뚝이며 배를 부여잡고 나에게 오는 김 씨.
“안녕”
“어, 결정은.... 했고?” 한마디하기도 힘들어 보이는 김 씨가 말을 건다.
“알잖아. 내가 무슨 결정 할지”
“...그래, 네 선택이니까. 한 십분 남았네, 백일은 아니었지만 행복이 뭔지는 대충 알았지?”
“그럼, 조금이라도 알았지, 엄마한테 살갑게 해줘서 고마웠어, 난 평생 못했거든, 엄마 많이 슬프겠지? 조금만 슬퍼했으면 좋겠는데”
“바보냐? 네가 포기하면 다 죽는다고 했잖아. 네가 결정한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는 거야, 넌 죽는 걸 선택했으니까, 그건 네 책임이지. 몇 분 남았냐?”
“....”
“곧 두 갈래 길이 보일 거야, 왼쪽으로 가면 돼, 다음 생엔 만나지 말자, 너 인생 진짜 재미없더라” 김 씨가 농담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내가 만약에 살면 김 씨 너도 사냐?”
“살겠지, 네 명이 다 할 때까지, 나는 너라니까.”
“엄마도 살까?” 김 씨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살겠지” 붕 뜨는 느낌과 함께 온통 검은 공간에 나무문 두 개가 보인다. 귀와 머리 그 어딘가에서 안돼! 하는 소리가 우웅 거렸다. 문고리를 돌려 연다.
비릿한 피 맛과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덮쳐왔다.
“아아악!!!!”
민석이 두 번째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