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한국에서 인도네시아로
1. 천년과 천년 사이
서기 1999년, 천년이 저물 때다. 한 사람의 생애에서 두 번은 절대 없을 다가오는 밀레니엄, 그 울림으로 지구촌 곳곳이 술렁였다. 그때 내 나이 45세, 내 나름 생의 정 중앙일 때다. 천년과 천년의 끝과 시작, 그리고 내 삶 정 중앙의 만남. 의미를 부여하면 절묘해지고 부푸는 것이 가치 아니랴. 생각이 복잡해졌다. 새천년이란 이 공룡, 과연 어찌 영접하고 어찌 조화하면 좋을까.
천년과 천년 사이를 비집어 들어가 내 시공을 만들기로 했다. 한 때 푹 빠졌던 산수화 그리기를, 저만치 밀쳐두었던 때다. 잘하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대안인 것처럼 파고들던 현대서예 실험도 뒷전이었다. 불확실성을 정복하지 못했던 거다. 다시 고전 서예와 문인화 사이를 넘나드는 자유(?)를 즐겼지만 뭔가 석연찮았다. 그래서 필법의 기초와 이론 정립을 절대 가치로 여겼을 거다. 틈만 나면 고전을 다시 훑고 한편으론 서예 이론을 풀어내는 산문 쓰기에 몰두했다. 현실에서 뚫고 나가기 어려운 것을 고전 공부나 글쓰기로 해소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다만 붓과 먹으로 도달하지 못한 숙제가 시와 산문으로 고뇌하는 순간에 더 깊이 발효되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다시 먹을 갈고 붓을 쥐게 했는데 나는 그 순환을 즐겼다.
글을 많이 썼지만, 추려 내놓을 것이란 빈약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평가는 염두에 두지 않기로 했다. 내 글쓰기가 서예가로서, 또는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안내자로서 좀 더 확실히 알자는 것이었듯 모아놓아야 디딤돌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모아 한 권으로 묶은 것이 2천 년 3월에 발간한『손인식의 먹빛 찾기』다.
『먹빛 찾기』는 1990년대 10여 년에 걸친 내 글 모음이다. 몇몇 서예 월간지에 연재한 글, 대학의 강의와 공개강좌 자료, 서예학술세미나에 참여한 소논문, 일본서단 견문기,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동양문화 고급과정 수료 시 제출한 논문, 그리고 문인화의 현대적 패러다임에 관해 기술한 몇 편의 글 등을 수록한 인재 손인식의 4번째 책이다. 당시 만해도 풀어쓴 서예 이론이 드물었던 때문일까? 비교적 환대였다.
때마침 불어온 IT 열풍도 반갑게 맞았었다. 새천년 마중으로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것이 없지 싶었다. 그렇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인터넷을 많이 활용하는 편이다. 웹은 공간이 무한해서 좋다. 활용하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터를 내어주는 그 유연함이 좋다. 저장하기 좋고 꺼내 쓰기 좋으니 이 아니 좋으랴. 작가로서 활용도가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으니 애용함이 마땅하지 않은가.
https://www.youtube.com/watch?v=g3BliamQp8Y&t=236s
IT와 친해진 것은 사는 곳이 대치동이란 영향도 좀 있었을 게다. 작은 고개 하나 넘어가 미국의 IT 메카 실리콘벨리를 본뜬 테헤란 벨리였으니까. 여태명 교수(원광대 서예과), 현초 이호영 작가 셋이서 뭉쳤다. 1999년 봄 (주)서예로(초명은 세인인터넷)를 창업한 것이다. 무한 공간에서 대상에 구애됨이 없이 서예문화를 제대로 펼쳐보자는 서예 포털 사이트 구성이 목적이었다. 이에 관해선 쓸 내용이 많다. 여기선 일단 장을 넘긴다.
새천년 마중으로 내 새울 것이 또 있다. 《월간 까마》창간이다. 1999년 11월에 창간호를 선보였다. 창간호 콘텐츠 초안 짜기가 내 담당이었다. 뭔가 새로운 장을 여는 느낌이었다. 그땐 분명 그랬다. 월간지 발행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경험자들은 알리라. 그래서 함께였다. 하석 박원규 스승께서 선장이셨다. 능력을 갖춘 동문들이 모두 동의했다. ‘서예인들이 만드는 서예전문지’로 한국서단에 새 바람을 일으켜보자고 다짐했다.
그 후 3년여 만이다. 나는《월간 까마》편집주간 임무와 작별했다. 2003년 3월 마치 예정된 것처럼 한국을 떠나면서다. 제법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였다. 한국을 떠나지 않으면 내 욕심이 스스로를 지키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때 건강을 중심에 두고 심사숙고하여 결정한 그 결론은 지금 와서 돌아볼 때 참 잘 한 결정이었다.
《월간 까마》는 그 후 2006년 1월호까지 발행되었다. 2006년 2월호부터는 공동 창간인이었던 삼여 송용근 선생께서 도맡아《월간 묵가》로 재 창간하여 발행하다가 2019년 2월 통권 157호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한 때의 열정과 수많은 기록들을 한국서단의 한 역사로 남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