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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정원 Apr 19. 2023

너도 사랑이 필요하구나

 예전에 나는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손이었다. 죽어 가는 화초도 우리 집에만 오면 새싹이 돋고 삶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집으로 데려와 치료도 해 주며 화분 수를 늘렸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 쓰레기장에 버려진 삐쩍 마른 군자란을 보았다.

 어떤 사람이기에 물도 안 줘서 말라 죽이는지 이해가 안 갔다. 불쌍한 생각이 들었지만 살아날 것 같지 않아서 데리고 올지 말지 한참 들여다보며 망설였다. 지금까지 시들어 죽어 가던 화초가 내 손길에 살아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 살려 보자. 우리 집에 없는 군자란을 살려서 키워 보자.'

 다 죽은 화분을 주워 왔다는 핀잔을 들으며 베란다 한쪽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날부터 매일 들여다보면서 마른 잎도 잘라 주고 정성껏 돌봐 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세히 보니 아주 조그만 싹이 파랗게 얼굴을 내밀었다. 

 너무 신기하고 좋아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남편과 아이들이 뛰어 들어왔었다. 그렇게 기쁨을 준 군자란이다. 세월이 흐르며 군자란은 새끼를 치고 풍성해졌다. 분갈이를 통해 늘어난 군자란을   분양해 주며 친구들에게 인심도 썼다. 

 해마다 봄이 되면 한결같이 우리 집을 탐스럽고 화사한 주홍빛 꽃 장식으로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기특하고 고맙다는 생각보다는 당연히 꽃을 피워야 하는 화초다. 꽃이 피면 자랑스럽게 앞 줄에 세우고 꽃이 지면 새로운 화분에 앞자리를 내주며 구석으로 밀려나 스쳐가는 눈길에 꽃 피우기만 기다리며 죽은 듯이 있었다.



 작년 12월, 추위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제법 쌀쌀한 날씨였지만 빨래 말릴 생각만 하고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저녁이 되어 창문을 닫으려고 나가보니 햇볕에 상쾌해진 빨래가 살짝 얼어서 뻣뻣해졌다.

 다음날 아침 베란다에 있는 화초가 모두 축 늘어져 있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단세포인 나다. 아차 싶었지만 그래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호들갑을 떨면서 뒤늦게 뽁뽁이와 비닐로 이중으로 이블을 덮어 주며 이 정도 날씨에 얼어 늘어질 리는 없다고 위안을 했다. 보온을 해 주었으니 잎이 다시 생기를 찾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다 되었는데 살아나기는커녕 완전히 늘어져 있었다. 고층 바람이 추웠나 보다. 미안한 마음으로 언 잎을 잘라 주고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처럼 매일 들여다보며 한 뿌리라도 살아 주기를 바랐다.


 며칠 전, 다 잘려 나간 잎 가운데 파란 것이 보였다. 다행히 두 뿌리만 죽고 다섯 뿌리가 살았다. 굵은 뿌리에 잎이 잘려 나간 몰골이 형편없지만 파란 잎 옆에 꽃대도 뾰족이 얼굴을 내밀었다. 올라 오기 힘에 겨운지 자라지 못하는 꽃대 세 개가 잘려 나간 잎 속에 파묻혀 있다. 뭐가 좋다고 일 년에 한 번만 예뻐하는 주인을 위해서 안간힘을 쓰며 꽃을 피우려는지 미안하기만 하다. 어쩜 버려질까 무서워 꽃을 피우려는지도 모르겠다. 살아 준 것만도 고맙고 기특한데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 겨우 살아 나자 꽃 대가 좀 더 자라서 꽃을 활짝 피워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을 주고 생명을 불어 주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메말라 버린 손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몇 년 전부터 화초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신경을 쓰지 않아도 때가 되면 당연히 꽃 피우며 우리 가족을 기쁘게 해 주는 아이들이었다. 지금까지 생명을 주는 잘란 손 때문이 아니고 사랑과 정성을 먹고살았던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손은 사랑과 정성으로 만들어진다. 갑자기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랫가락이 떠오른다. 내년에는 예전의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도록 사랑과 정성을 듬뿍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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