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놈 위에 노는 놈, <Peanut Portraits> 스누피 OST
'사운드'라는 물감이 있다면 어떤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얼마전 '사운드팔래트'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프로듀서 2명과 보컬 2명이 각자가 갖고 있는 소리를 재료 삼아 쪼개고 섞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음반까지 발매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창동OPCD 공간이 궁금하기도 하고(신진 음악인들의 하입을 추구하는 공간이라고 한다) 호기심에 음반 욕심까지 생긴 나머지, 아직 학부생인 나는 겁도 없이 여기에 프로듀서로 지원했다. 그런데 나머지 세 명은 완전히 전문적인 음악을 하는 프로 뮤지션들이 아닌가. 작업하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민폐를 끼쳤지만 그래도 '프로라면 나는 어떤 음악을 해야할까', '나는 대체 음악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걸까'와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 뼈아픈 성장의 시간이 되었다.
통달한 무당을 보고 사람들은 '논다'고 말한다.
나도 음악을 그렇게 하고 싶다.
음악은 세상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고, 내 삶의 이유다. 음악으로 우주나 바다를 만들고 싶고, 나의 슬픔을 담아내고 싶기도 하다. 어린 아이들이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노는 것 처럼 순수하고 재밌게 죽을때까지 음악을 하고 싶다.
나는 음악으로 놀고 싶다.
스누피 애니메이션은 어린 내가 보기에는 너무나 심심했다. 숱이 몇 올 없는 대머리(?)주인공(찰리브라운)은 요술공주 밍키처럼 예쁘지도 않고, 스토리는 꼬마자동차 붕붕처럼 다이나믹하지도 않으며, 그 흔한 가가멜같은 악당 한 명 나오지 않는다. 말없는 강아지 한마리(스누피)는 대체 지붕 위에서 뭘하는 건지...
영미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이야기의 맥락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딱 한 명,
장난감 그랜드피아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항상 머리를 조아는 노란머리 한 명은 눈에 들어왔다. '슈뢴더'라고 하는 그 캐릭터는 꼭 잡을 수 없는 별 처럼 그랜드피아노를 그리워하는 나 같았다.
네살 때 엄마 손을 잡고 처음으로 가본 백화점(지금의 삼성플라자 건물) 지하 1층에서 햐얀 드레스를 입은 피아니스트가 엄청난 덩치로 누워 있는 검은색 피아노를 치고 있는 광경을 보았다. 그 순간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꽝'하고 번개를 맞은 것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그 때는 그게 '그랜드 피아노'인줄도 몰랐다.
그 이후로 엄마를 끈질기게 졸랐더니 엄마는 5년 후에 월부 3만원으로 어렵사리 피아노를 사주셨다. 어려운 형편에 피아노 학원은 갈 수 없었지만, 피아노를 잘 치면 언젠가는 그랜드피아노를 사게 될거라고 믿으며 엄마가 구해주신 체르니 카세트 테이프를 들으며 날마다 피아노를 쳤다.
이런 캐릭터가 중간에 떡하니 그려져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스누피ost LP는 살만한 이유가 된다. 그리고 빈스과랄디가 연주하는 업라이트 빈티지 피아노 소리는 왠지 LP로 들어야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또 하나. 중학생이 되면서 뉴에이지 음악을 알게됐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을 조지윈스턴 음악을 들으며 지냈다. 그렇게 나에게 영향을 준 조지윈스턴은 자신에게 음악적 영향을 가장 많이 준 사람으로 스누피OST를 연주했던 '빈스과랄디'를 꼽았다. 그렇다면 나의 음악 세계 밑에도 빈스과랄디가 어느 정도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빈스과랄디는 감사하게도 스누피 에니메이션OST를 재즈로 만들었다. 과하지 않으나 재즈의 세련미가 충분하고, 주요 청자일 어린이를 의식해서인지 블루지 하지 않고 밝으면서도 여전히 아름답다. LP로 듣는 조율이 덜 된 것 같은 피아노 소리는 마음에 따뜻한 위안을 준다. 이게 '재즈'로 노는게 아닐까?
음반 <Peanuts Portrait>는 스누피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테마를 중심으로, 그동안 발매되지 않았거나 조지윈스턴을 포함한 다른 연주자가 재해석한 연주로 채워진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내가 꼽은 이 음반의 최애곡은 조지윈스턴의 깔끔한 피아노 연주와 특유의 화려한 에너지가 덧입혀진 B면 마지막곡 'Linus and Lucy'.
각박하고 복잡하고 힘든 세상속에서 재즈를 군더더기 없이 단백하면서도 아름답게, 심지어 어린이도 같이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고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빈스 과랄디에게 감사하다. 더불어 나의 힘들었던 10대를 음악과 함께 할 수 있도록 해주고 불과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조지윈스턴에게도 하늘까지 내 마음이 전해지도록 두 손 모아 '감사해요'하고 속삭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