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한 정신과에 가보기 전에는 진료실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매우 궁금했다. 어차피 내가 겪는 문제들에는 답이 없는 듯한데, 과연 병원에서 무슨 말을 해줄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었다. ‘얼마나 힘드셨어요’ 같은 상투적인 공감이 이뤄지는 곳이라면, 과연 그러한 말들이 나를 우울에서 끌어올릴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병원에 가본다면 꼭 다른 사람들에게 그 후기를 들려주리라 다짐했었다. 오늘은 정신과에 다니면 선생님과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말해보려 한다. 물론 이건 그저 나의 이야기일 뿐, 당연히 병원마다 진료 방식이 다를 것이며 같은 의사도 환자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할 것이다.
“뭐 그냥, 별 얘기 안 해.”
병원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별 얘기 안 한다는 대답을 한다, 정신과 방문의 문턱을 낮추고자 관련 만화도 그리고 글도 쓰는 사람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다니. 어이없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이다. 병원에서 별 얘기 안 한다.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감명 깊은 말을 듣고 오는 날도 있지만, 그저 평범한 일상 이야기를 하고 오는 날이 더 많다. 또한, 병원에 간다고 해서 선생님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단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진료실에 들어가면, 선생님은 항상 “어떻게 지냈어요?” 로 대화를 시작하신다. 그러면 나는 지난 1, 2주 동안 있었던 일, 느꼈던 감정을 말한다. 그렇게 말을 하다 보면 생각이 정리가 되기도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말을 하기 위해 생각을 미리 정리해 놓는다. 일상생활 속에서 틈틈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병원에 들어가기 직전 할 말을 생각하기도 한다. 병원에 간 첫날에는 별 준비를 하지 않고 갔다. 너무 두서없이 말해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이후에는 병원 가는 길에 어느 정도 할 말을 준비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마치 감정 가계부를 쓰는 느낌이다. 이 과정이 꽤나 치료에 도움이 된다. 매우 큰일이 일어났다고 느껴서 이번에 병원에 가면 꼭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병원에 갈 때 즘 되면 이미 마음의 안정을 찾은 상태인 경우도 많다. 별 일 아니라고 여기고 지나갔는데 돌이켜보니 나의 감정 변화에 은근 영향을 주었음을 그제야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다. 길을 잃고 떠돌던 감정들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주는 느낌이 든다. 쉽게 말하면 내 감정을 잘 살피는 습관이 생긴다.
또한 그렇게 말을 하다 보면 감정을 분출하여 다른 좋은 감정이 들어올 자리가 생긴다. 감정이 무한대로 우리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감정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면 아무리 욱여넣으려 해도 들어가지 않는다. 그리고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상한다.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것 만으로 힘든 일이지만, 그것을 주기적으로 분출하지 않으면 감정이 고이고 썩어서 더 힘들어진다. 병원에 갈 때마다 1, 2주 분량의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 별 일 아닌 듯해도, 감정이 곪지 않게 해주는 중요한 행위다. 특히나 우울증 환자에게 이 과정은 아주 중요하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생님이 나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마디씩 던지시는 질문들이나 반응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우울감에 지배되면 시야가 좁아져서 너무나 당연한 것조차 보지 못할 때가 많은데, 선생님이 툭 던지는 한마디에 더 넓은 곳을 보게 될 때가 많다. 예를 들면, 나는 어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너무나 힘들어하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런데 그걸 꼭 본인이 해결해야 하는 걸까요?’라는 말씀을 하신다. 존재할 것이라 생각지 못했던 길을 보게 된다.
처음 병원에 다닐 때는, 병원에 가서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선생님에게 나를 알리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시간은 선생님께 나를 알리는 시간이 아니라 나 자신에 관해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답을 찾으러 간 병원에서, 나 스스로 답을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답은 이미 내 안에 있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