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암환자가 되었다.

암 상담 간호사, 어느 날 암환자가 되었다.

by 한사랑

입김이 하얗게 번지던 2012년 어느 겨울날. 나는 암환자가 되었다.


종합병원에서 3교대 근무를 하다 외래로 온 지 5년. 나는 외래의 상담 간호사로 일하는 중이었다.

매일 수십 명의 환자를 만났다. 암을 진단받은 사람, 치료 중인 사람, 검사를 원하는 사람 등등.

그중에 상담이 가장 어려운 경우는 암을 처음 진단받은 분을 마주할 때였다.

머리가 아득하고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상태. 그런 분들께 무언가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허공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일인지라, 내가 할 수 있는 건 검사 일정과 주의사항을 나중에라도 보고 이해하실 수 있도록 꼼꼼히 적어드리는 것뿐이었다.

답답하기도 했다. 바쁜 업무에 시간에 쫓기다 보면 잠깐잠깐 기억을 잃은 듯 다시 묻는 환자들이 피곤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들의 무너짐에 전염되어 지쳐버렸던 걸지도.

매일 오늘은 그러지 말자 다짐하면서도 나는 말 많은 딱딱한 간호사가 되어갔다.


그리고 그 겨울 바로 그날, 나는 설명하는 사람이 아닌, 설명을 듣는 사람이 되었다.

퇴근 후 평소처럼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는데 가슴에 멍울이 만져졌다. 생리할 때가 된 걸까?

그런데 모양이 좀 이상하다. 흔히 만져지던 멍울이 아니라 500원짜리 동전이 들어있는 것처럼, 경계가 분명했다. 교과서에 쓰여있던 유방암 증상 중 하나가 이런 거 아니었나?

불길한 마음에 다음날 유방외과 예약을 했다.


"아니겠지만, 일단 오늘 검사부터 받아보세요."

진료 후 의사 선생님의 말씀에 나도 가볍게 그렇게 생각했고, 근무 중인지라 당일 가장 마지막 검사로 예약을 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부지런히 근무지로 돌아갔다. 별거 아닌데 내가 너무 유난을 떨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왕 검사까지 잡아주신 거 해보자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다시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에게 위로를 건넸다.


누워있으니 기분이 이상하다. 이런 검사를 받고 나를 찾아오셨겠구나. 검사복으로 갈아입고, 검사대에 누워 있으면 이런 느낌이구나. 그냥 검진이 아니고 진단을 받는 검사는 이런 기분이구나. 의료인인 나도 이렇게 떨리는데 병원이 처음인 분들은 오죽하셨을까.

가슴을 드러내고 검사를 받는 건 생각보다 창피하고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초음파를 해주시는 선생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다. 봐도 모르면서 검사 모니터에만 자꾸 눈이 간다.

초음파 기계를 문지르며 모니터를 번갈아 보시던 선생님은 무심히

"조직검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바늘로 조직을 좀 채취해서 검사를 해보는 건데, 많이 아프진 않지만 좀 따끔할 겁니다. 여기 biopsy 준비해주세요."

병동에서는 내가 수없이 준비해왔던 조직검사 키트가 다른 간호사에 의해 준비되었고, 나는 어시스트가 아닌 환자로 조직검사를 경험했다.

"수술할 때 필요할지도 모르니 림프절 검사도 할게요."

선생님..? 수술.. 이요..? 지혈하며 검사실 밖에 앉아있는데 머리가 멍했다. 꿈인가? 이게 현실 맞나?


암이라는 게 너무나 저명했는지 보통은 일주일씩 걸리는 초음파 결과보고가 냉큼 한 시간 만에 나와있었다.

유방암. 하지만 아직 조직검사가 남았다. 확진은 조직검사 결과를 보고 내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직 결론은 나지 않은 거다.

그리고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일주일.

신기한 건 생각보다 담담했다. 너무 담담해서 내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도 '진단받으면 치료받으면 되지. 호들갑 떨 거 없어.' 하는 막연하고 대책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늘 환자들에게 설명해왔듯 나도 똑같이 검사하고 수술하면 된다며, 남의일처럼 생각해버렸던 건 아니었는지. 그때는 몰랐는데 이미 나는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모하게 용감했던지.


일주일 후.

결과를 들으러 진료실 안에 들어가 앉았는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교수님의 말씀은 예상 밖이었다.

나지막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이야기해주셨다. 암이 임파선까지 전이되어 바로 수술은 어렵겠네. 바로 수술을 하면 아마도 광범위 수술이 될 테니 항암치료로 사이즈를 줄여보고 결과에 따라서 수술을 해보자.

항암.. 이요?


내 나이 서른셋. 나는 그렇게 암환자가 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