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살. 내 월급을 떼먹고 폐업한 회사 덕분에 나는 부산 노동청의 위치를 알게 되었고, 실업급여라는 좋은 제도도 알게 됐다. 일을 하고 돈을 못 받는다는 걸 상상조차 해본 적 없었던 나는 제대로 멘붕이 왔다. 어쩐지. 일이 이렇게 술술 풀릴 리가 없지. 월급 많이 준다고 할 때부터 이상했어. 내가 뭐라고.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날 한심하게 보는 친구들 보란 듯이 잘하고 싶었는데... 젠장! 백수가 되고 나니 어쩔 수 없이 부모님도, 친구들도 모두 내 소식을 알게 됐다. 일 한 대가를 받지 못한 억울함이나 분노보다 창피함이 앞섰다. 취업했다고 자랑하지 말걸. 낯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 구나... 안 그래도 잔뜩 쪼그라든 나에게 아빠가 지어준 새 별명은 치명타를 안겨주었다.
아빠는 출근하실때마다
"김백수~ 오늘도 재밌게 놀아!"
퇴근하실 때 도
"김백수~ 재밌게 놀았어?"
라며 나를 놀렸고 그때마다 발끈하는 내가 너무 재밌으셨단다. 재미 붙인 아빠는 더 열심히(?) 별명을 부르셨고 악의 없는 장난임을 알았지만 너무 자존심이 상해 어디든 빨리 취업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전 회사에서 같이일했던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나 취업했는데 여기 사람 뽑는데. 너 이력서 내볼래?"
그렇게 나는 백수생활 두 달 만에 김백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번 회사는 남자 직원들이 정말 많았다. 15명 중 단 3명만 여자 직원이었다. 얼굴 보고 뽑은 건지 하나같이 훈훈한 외모였다. 여기 뭐지. 천국인 건가. 직원들끼리 딱히 대화를 한다거나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여기 진짜 최고다! 뼈를 묻어야겠군!
행복했던 다짐도 잠시, 처음 6개월은 무난하게 월급이 잘 나오는 것 같더니 아니나 다를까. 여기도 월급이 밀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보름 밀리더니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었다. 한번 겪어봤던 일임에도 처음 밀릴 때 단호하게 퇴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결국 5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3개월치 월급이 밀린 채로 퇴사할 수 있었다.
나 같은 사회 초년생이 또 있을까.
2년 동안 세 군데 회사를 다녔는데 첫 회사는 박봉이었고 두 번째, 세 번째 회사는 월급 떼이고... 이렇게 재수 없어도 되는 거야? 이쯤 되니 진짜 애니메이션 일은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부모님이 옳았어. 다른 일을 찾아보자.
나는 동네에 있는 작은 간판집에 취직했다. 경리일과 간판 디자인을 같이 하는 일이었다.
간판집 일은 참말로 재미가 없었다. 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러 근무시간 내내 몇 번이고 시계를 봤다. 야근도 안 하는데 이렇게 업무시간이 길게 느껴지다니.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일할 때는 정신 차려보면 밤이었는데... 이런저런 생각들로 심란해 있던 그때 내 취업 소식을 들은 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드디어 정신 차렸구나! 이제 월급 떼이지 말고 착실하게 돈 벌어!"
정신 차렸구나...라고? 착실하게? 저 말들이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내 꿈을 포기하는 게 정신 차렸단 소릴 들을만한 일인가. 고작 23살인데. 이 정도 도전도 못 할 일인가? 어마무시한 꿈을 꾸는 것도 아닌데... 가슴속에서 뭔가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후회가 남지 않게 다시 한번 하고 싶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들었다. 친구 덕에 열정에 불이 붙은 나는 그날부터 퇴근하고 매일 밤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간판집에서 일하는 동안 내가 얼마나 애니메이션 일을 좋아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다른 일을 해보니 알 수 있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다가 한발 물러나보니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다. 두 달 후, 포트폴리오가 정리되고 나는 다시 한번 애니메이션 회사에 취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