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과도 같았던 2시간의 점심 시간
내가 H그룹 지주사 재무회계팀 신입으로 들어갔을 때, 회사에서 복리후생이라고 사원들에게 안내한 사항 중 조금 특이했던 점이 바로 점심시간이 2시간이라는 점이었다. 다들 아는 것처럼 직장에서 점심시간은 보통 1시간이 주어진다. 그래서 직장 동료들과 함께 오늘은 어떤 메뉴를 먹을지 심도 깊은 고민을 나누며 잠시나마 망중한을 즐길 수 있는 것이 바로 점심시간인데, 그 소중한 시간을 2배로 부여한다니 위 제도는 당연히 너무나 달콤한 열매와 같이 보였다.
하지만 기업이 손해보는 장사를 할 리 있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점심시간이 1시간 늘어난 만큼 퇴근 시간은 1시간 늦게 설정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일반적인 회사는 9시 출근이면 6시 퇴근, 8시 출근이면 5시 퇴근이 원칙이나 이 곳은 8시 출근인데 1시간 늦은 6시에 퇴근을 하도록 설정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퇴근시간이 1시간 늦어짐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복리후생이랍시고 설명하는 회사의 입장이 나는 참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실제로 나뿐만 아니라 이 제도에 대하여 기존 직원들 역시 그나마 적응해서 다니는 사람만큼이나 불만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았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주어진 점심시간 2시간 동안 점심만 먹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이다. 지주회사의 많은 업무량을 소화하기 위해서 대부분의 직원들은 점심을 1시간 내로 빠르게 먹고 와서 남은 시간은 업무에 매진했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이를 점심시간으로 근태관리 프로그램에 설정해놓았으니 이는 수당 없는 잔업이다. 돌아보면 재무회계 직렬은 대부분의 회사에서 업무 강도가 높은 것으로 유명한데, 각 계열사의 재무 정보를 취합해 연결재무제표를 만드는 지주회사의 업무 강도는 매우 살인적이니 이는 어쩌면 불 보듯 뻔한 일이기도 하다. 점심시간에 이렇게 업무를 하는 선배에게 내가 여쭤보면 돌아오는 대답은 이러했다.
"아, OO씨도 우리 눈치보고 일하라는 것은 아니에요. 그냥 지금 업무를 해놔야 내가 집에 조금이라도 빨리 갈 수 있으니까 자발적으로 하는겁니다."
이 대답을 들은 내 머리 속에는 '집에 조금 늦게 갈지언정 휴게시간에는 휴식을 하고, 오후에 연장근로 결재를 올리고 정당하게 수당을 올려서 보상을 받는 게 낫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이 바로 떠올랐다. 하지만 애초에 20시간 포괄임금제를 적용하는 사업장이고, 관리자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말리지 않는 것을 보면 이 사람도 이미 이러한 불만 따위는 초월한지 오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굳이 더 이상 의문을 표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결국 점심시간은 오전 근무시간과 오후 근무시간의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근무지에서 몸이 멀리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휴식을 취하려고 해도 집처럼 편하게 쉴 수는 없고, 심지어 업무에게 그 영역을 침범당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애초에 제대로 쉬기도 어려운 회사 내에서의 휴게시간이지만, 위 사례처럼 종종 업무 여건 상 법적인 휴게시간조차 보장되지 않는 경우마저 생기는 것이다.
또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는 보통 표준적인 근무시간을 '9 to 6'라는 말로 표현하고는 한다. 하지만 이는 다른 나라에서 보면 다소 이질감을 느낄 수 있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나라는 주 40시간, 다시 말해 하루에 8시간을 근무하는 표준 근무 형태가 '9 to 5'이기 때문이다. 휴게시간이라는 명목으로 점심시간 1시간을 따로 근무시간 도중에 가지는 나라는 드물다. 이를 규정한 근로기준법 상의 조항은 하기와 같다.
근로기준법 54조 (휴게)
① 사용자는 근로시간이 4시간인 경우에는 30분 이상, 8시간인 경우에는 1시간 이상의 휴게시간을 근로시간 도중에 주어야 한다.
② 휴게시간은 근로자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위를 준용하면 정확히는 4시간을 일할 때 마다 30분의 휴게시간이 주어지는 것이라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는 과거 근로기준법이 준수되지 않고 고강도의 노동에 시달리던 산업화 시기에 사용자가 점심시간은커녕 휴식 자체를 보장하지 않고 근로자를 착취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정부에서 이를 방지하고자 만든 내용이다. 이 때는 꼭 필요한 조항이었겠으나 사회 각계각층에서 많은 노력이 이루어진 끝에 근로환경이 많이 나아진 지금은 역설적으로 이것이 독소조항으로 작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똑같이 미국의 회사에서 8시간을 근무할 때 9시에 출근하면 연속적으로 8시간을 근무하고 17시에 퇴근한다. 그럼 점심은 어떻게 먹는지 궁금할 텐데, 그냥 자리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 같은 것을 먹으며 업무를 보는 식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영단어 'Lunch'는 실제로 가벼운 식사를 의미하는데, 그 의미의 기원이 이와 같은 행태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휴게시간이 철저하게 보장되어서 점심시간 1시간을 오롯이 내 시간으로 쓸 수 있더라도, 결코 집에서 쉬는 것만은 못하다. 대부분의 근로자는 집중해서 일하고 1시간 일찍 퇴근할 것인지, 중간에 회사에서 1시간을 쉴 것인지 고르라고 하면 십중팔구 전자를 택할 것이다. 물론 위 내용을 제정할 때 관련 당국의 취지는 당시 상황에 입각한 법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세상은 변했다. 내가 감히 법의 철폐를 논할 수 있는 자격도 없거니와 입법권을 가진 사람은 더욱이 아니지만, 현 시점을 기준으로 볼 때 근로기준법 제 54조는 현실적 관점에서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 나라마다 상황이 모두 다르다고는 하나, 보통 우리나라에서 항상 준거집단으로 제시하는 OECD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해봐도 현재의 제도는 통상적 기준과 너무나 유리되어 있다.
법은 사회의 여러 요소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고, 가장 느리게 변하는 항목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현재 실정에 맞지 않는 법은 일종의 문화지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법을 문화라는 총체의 일부로 봤을 때, 나아가 우리의 경제적 규모와 노동인권을 고려할 시 너무나 지체되어 있는 해당 근로기준법 조항 역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나라 기업문화에서 개선되면 좋을 또 하나의 문제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