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는 야근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왕왕 있었지만, 최근 우리 회사는 야근할 일이 없어요!"
가장 최근인 저번 달에 퇴사한 S정유사 신입사원 교육 때 인사팀 세션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인사팀은 신입사원들의 연봉계약서를 작성하며, 동시에 스크린에 아마 매년 사용하면서 적당히 업데이트하고 있을 복리후생 자료를 송출하며 자신 있게 위의 내용을 말했다. 연봉계약서를 여러 번 작성해본 나는 저 말을 듣고 우선 계약서를 살펴보며 고정OT(Overtime)가 존재하는지부터 열심히 찾았다. 기쁘게도 고정OT는 계약서에 없었다. 이는 잔업이 발생할 경우 수당을 지급한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므로, 저 말인즉슨 회사에서 인건비 절감을 위해서 야근을 시키지 않는 것이려니 하고 생각했다. 다만 동시에 의문 역시 따라왔다. "내 평생 기업의 어떤 직무에서도 야근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부서는 본 적이 없는데, 저 말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그리고 얼마 후 인사팀의 저 말은 굳이 나누자면 진실보다는 거짓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회사에서 연봉계약서를 작성해 본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 있겠지만, 우리나라의 근로계약 형태 중에는 여전히 포괄임금제가 존재한다. 2010년에 대법원 확정판결(2010.05.13 2008다6052)을 통해 감시/단속적 근로자와 같이 업무의 성격을 고려할 때 근로시간의 산정이 어려운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포괄임금제는 위법함이 적시되었으나, 기업들은 기존의 포괄임금제 계약서를 현재의 법 실정에 맞게 재작성해서 사실상의 포괄임금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기본급을 베이스로 상여금 등을 통해서 기본적인 연봉제 계약의 틀을 잡고, 앞서 내가 말했던 '고정OT' 수당을 계약서에 명시해서 매달 지급하는 것이 바로 중소기업에서 대기업까지 대부분의 기업에서 이용하는 방법이다.
고정OT의 개념은 이러하다. 일반적으로 야근수당은 야근을 했을 때만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미리 계약서에 매달 약정한 시간을 연장근로한 것으로 간주하고 해당 야근수당을 '선지급'할 것을 명시하는 것이다. 약정된 시간은 10시간, 20시간 등 다양하다. 이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아니, 야근을 하지 않아도 야근 수당을 준다고? 이래서 대기업 들어오는구나!"하고 좋아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로 인사팀도 저런 식으로 근로자에게 유리한 조건인 것처럼 속여서 말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내가 H그룹 지주회사에서 재무팀으로 채용되었을 때, 당시 인사담당자는 "여러분이 출근 및 퇴근할 때 보통 딱 맞춰서 오지 않고 살짝 일찍 오시고, 살짝 늦게 나가시는 것까지 급여로 챙겨드리기 위해서 있는 조항입니다."라는 식으로 설명을 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거짓말이다. 위 인사담당자의 말이 사실이려면, 일단 매일 출퇴근할 때 이른 출근이나 퇴근 시 살짝 늦게 나가는 자투리 시간을 모두 인사시스템에 반영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대기업 전산에서 직원은 연장근로를 전혀 하지 않은 상태로 기록된다. 만약 잔업이 실제로 없다면 이는 근로자에게 이득이지만, 근로자가 만약 야근을 하게 될 때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 계약서에 명시된 고정OT가 20시간이라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내가 야근을 한다고 해도 20시간까지는 야근을 해도 돈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법리적으로는 회사는 이미 20시간에 대한 잔업수당을 선지급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지급 의무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전 글에서 말했듯이, 우리나라는 대기업들조차도 근로시간 산정에 대해서 충분히 분/초 단위까지 하려면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내용이 기업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잔업 결재를 부서장에게 올리고 그것을 득했을 때만 잔업 시간이 인사시스템에 기록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 감안하면 근로자가 해당 20시간을 아직 채웠는지 못 채웠는지 기업에서 단언하기는 어렵기에, 저것은 기업 입장에서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사실상 야근을 하고도 잔업수당을 못 받는 경우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혹자는 그렇다면 계약 당시에 해당 고정OT 조항을 거부하고 기본급에 포함시켜주지 않으면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근로자의 권리가 매우 빈약하고, 사실상 연봉 협상이라는 것이 노룩(No-look) 사인으로 이어지는 국내 노동시장에서 근로자가 계약서의 조항에 대해서 감히 첨삭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경력직의 경우라도 연봉 조건이나 몇몇 세부사항의 '액수'를 다투는 것은 가능할지언정 해당 회사의 계약서의 '형태'를 논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내가 있었던 기업 7곳 중 4곳이 해당 포괄임금제 계약서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수당 없는 야근의 시작점이다.
돌고 돌았지만 이제 다시 처음 얘기하던 S정유사 얘기로 돌아오고자 한다. 앞서 말하였듯이 이 회사는 포괄임금제 계약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인사담당자 말처럼 야근이 없는 파라다이스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회사는 야근 시 대체 근태를 어떻게 처리한다는 것이었을까?
일단 이 회사는 야근을 하게 될 경우, 타사와 마찬가지로 인사시스템에 선제적으로 결재를 올려야 했다. 특이한 점은 이 때 야근한 시간만큼 다음 근무일에 쉴 시간을 입력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전체적인 한 달의 근무 시간은 160시간(=주 40시간 X 4주)으로 맞추는 시스템이었다. 참으로 송구하지만 이것 역시 법적으로는 문제가 될 수 있는 제도이다. 하루 8시간 이후의 근무는 '연장근로'라는 개념으로 가산되기 때문에, 1.5배의 시간이 가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야근 한 시간만큼 쉬는 게 아니라, 야근한 시간의 1.5배로 쉬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휴일이나 22시 이후 심야라면 그 시간은 2배, 2.5배로 더 증가할 수 있다.
예외적으로 회사에서 노사협의체를 거쳐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운영했을 때만 저런 식으로 하루는 오래 일하고, 그 다음 날은 딱 그 만큼 적게 일하고 하는 것이 유일하게 가능해진다. 실제로 회사에 누군가가 이에 대한 불만을 담은 글을 익명게시판에 올렸는데, 인사팀이 아닌 누군가가 우리 회사는 선택적 시간제로 해서 저렇게 주는 것 같다고 '추측'하는 댓글을 단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보기에는, 이 회사는 철저하고 엄격하게 9 to 6로 근무시간을 운영하고 있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는커녕 탄력근무를 통한 출퇴근 시간의 변경도 육아 관련 사유가 아니면 제도적으로 불가능하게 설정해두고 있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할 거면 근로자에게 유리한 출퇴근 시간의 자유로움을 포함한 부분까지 함께 가져가야지, 사용자에게 유리한 하루 근무 시간의 가산 기준만 골라 먹으려고 하는 것은 아주 웃기는 일이다. 분명히 엄격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을 것이다.
고정OT가 있든 없든 이처럼 잔업수당 없는 야근은 상술한 편법을 통해 도처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한다. 대기업이 어떻게 그렇게 하느냐 싶겠지만, 저러한 법률적인 문제를 어기더라도 누군가가 소송을 해서 이기지 않는 이상 바로잡기 어렵기 때문에 저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설령 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그 비용이 커서 실익이 없거나, 이기더라도 노동위원회 및 법원은 해당 개인에 대한 수당만 바로잡아줄 권리가 있다. 해당 계약서를 쓴 직원이 2만 명이라면 2만 명의 소송을 따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이 대기업을 상대로 소송하는 것도 어렵지만, 이기기는 더욱 힘든 상황에서 이 정도의 탈법은 사실 직장가에서 별로 생경한 일이 아니다.
처음 쓴 글에서 얘기했지만 사람이 일하는 이유는 모름지기 무엇보다도 돈 때문이다. 인간은 돈과 밥의 무서움을 마땅히 알아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일을 하는 것이다. 수당을 주지 않으면, 근로자는 노동 의욕이 저하되고 직무에 대한 몰입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기업들이 역설하는 '주인의식'을 가진 직원은 돈 없는 서비스 야근에서 바스라져 나간다. 인적자원의 가치를 낮추어 보고 일에 대한 품삯을 제대로 쳐주지 않으니 열심히 일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것이 계속되면 기업 입장에서도 당연히 손해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서비스 야근 역시 대한민국에서 근로자를 병들게 하고,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경쟁력도 떨어뜨릴 수밖에 없는 우리 기업문화의 뿌리 깊은 부조리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