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연애주의 : 또 다른 당연함
바야흐로 연애 산업 전성기이다. <하트시그널>부터 <나는 솔로>, <환승연애> 등의 예능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두면서 '연애'는 흥행 보증 수표가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연애하지 않는 사람은 늘고 있다. 2022 인구보건복지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만 19세부터 만 34세 청년 중 '비연애 상태'라고 응답한 사람만 65.6%였다. 그중 70.4%는 '자발적 비연애 상태'였다. 연애 산업 전성기를 살아가는 지금, 이들은 왜 비연애를 추구하게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혼자가 편하기 때문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주관 보고서 <청년 관점의 '젠더 갈등' 진단과 포용 국가를 위한 정책적 대응 방안 연구>에 따르면, 연애하지 않는 이유로 '돈ㆍ시간ㆍ감정적 소모가 커서'가 45.6%로 1위를 차지했다. 실제로 연애하면 순수한 사랑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심리적 비용을 부담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들을 재고 따지는 것이 피곤해지고, 내 삶의 패턴을 타인에게 맞추는 과정이 귀찮게만 느껴진다. 연애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을 체감한 후, 연애보다 비연애의 효용을 크게 느끼게 되는 셈이다.
또한 연애로 외로움의 갈증을 해소할 수 없음을 깨닫기도 한다. 연인은 '기간제 절친'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귈 때는 모든 일상을 공유하다가도, 헤어지면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다. 종국엔 허탈함을 느끼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비연애를 결심하거나, 외로움을 달랠 임시방편으로 '연애'가 목적인 연애를 시도한다. 그러나 사랑해서 사귀는 게 아닌, 사귀니까 사랑하는 관계에 회의감을 느낀다. 즉 연인이라는 표상이 필요할 뿐, 본인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해도 상관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들은 연애가 근본적인 외로움을 해소하는 수단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자기중심적인 삶에 가치를 두게 된다.
한편 젠더에 따라 비연애를 지향하는 동기가 상이하기도 했다. 여성의 경우 ‘가부장적인 연애가 싫어서’ 비연애를 결심했다고 응답한 비중이 20.7%로, 남성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여성 중 연애 의향이 없다고 밝힌 사람은 44.3%에 달했다. 이는 일부 여성에게 연애가 ‘성 불평등한 관계를 경험하는 계기’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남성의 경우 ‘돈ㆍ시간ㆍ감정적 소모가 크다’는 이유로 비연애를 결심한 경우가 51.3%로 여성에 비해 훨씬 높았다. 이는 여성에 비해 남성이 연애로 치러야 하는 비용의 문제를 더 부정적으로 인식함을 드러낸다. 이처럼 젠더가 비연애주의를 추구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러나 비연애를 결심하게 된 뚜렷한 이유가 있어도, 비혼주의도 아직 자리 잡지 못한 한국 사회에서 비연애주의자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다. 연애 중인 사람들 혹은 결혼, 출산을 경험한 기성세대는 비연애주의자들에게 조언하고 싶어 한다. "네가 아직 좋은 사람을 못 만나봐서 그래", "너무 눈이 높은 거 아냐?" 등 연애를 삶의 필수 요소로 전제하고, 비연애주의자가 연애라는 시스템에 편입되게끔 유도한다.
왜일까? 이러한 현상의 기저에는 연애를 생산성, 정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깔려 있다. 재학, 재직이 정상성의 범주에 드는 것처럼, 연애도 마찬가지이다. 연애-결혼-출산의 직선적 생애주기가 고착화된 한국 사회에서 연애는 결혼과 가족 형성의 이전 단계로 여겨진다. 즉, 정상 연애 이력은 정상 결혼에 편입되기 위한 하나의 스펙인 셈이다. 따라서 비연애 구간은 정상 생애 주기에서 시간을 낭비하는 구간으로, 이탈과 손실의 공기가 깃들어 있는 시간으로 평가된다.
결혼까지 바라보지 않아도, 연애 그 자체도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다. 모든 것을 성과로 환원하는 성과주의 사회에서는 '얼마나 좋은 짝을 만났느냐'가 개인의 가치를 증명하는 성적표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심화하면서 '연애하지 않는 사람들'은 일정 기준에 미달하는, 가치가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자연스레 솔로는 외롭고 불행한 존재라는 인식이 심어지며, 비연애 선언은 자신의 능력 부족에 대한 핑계로 여겨진다.
이에 비연애주의자들은 스스로에게 하자가 없고, 비연애 상태는 단지 자발적인 선택에서 비롯되었음을 증명해야 한다. 한 전문가는 "관계적 욕구는 본능의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지만, 연애는 결혼처럼 사회적 규범의 성격이 분명하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연애하는 사람들은 연애하는 이유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면, 비연애주의자들은 연애하지 않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비연애주의가 아직 자리 잡지 못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연애주의자들은 주로 '홀로 서기 맥락'의 비연애를 주장한다. 연애할 시간에 자기 계발하자는 이야기는, 기존의 정상성 시스템 안에서 비연애의 생산성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 시스템에 국한되어 있기에, '솔로=홀로'라는 사회적 인식은 전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솔로는 자기 계발을 위해 외로움을 감수해야 하는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비연애는 곧 비관계가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솔로가 외로운 존재로 여겨지는 이유는, '연애 이외의 사회적 관계를 불안정한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성애'는 친밀함을 이루는 최우선적이고 절대적인 관계로 표상된다. 연인 관계는 일대일의 독점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에서는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라는 말로 연인의 대인 관계에 깊이 관여하는 것이 암묵적으로 허용된다. 이는 이성을 '잠재적 연애 대상' 혹은 '타인'으로 분리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성이 단둘이 있기만 하면 ‘기승전썸’, ‘기승전연애’로 몰아가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한몫한다. 그렇기에 연인 관계가 아니면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거나, 인간적인 호감을 지속적으로 표시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현실은 솔로, 즉 비연애주의자가 비관계에 놓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인간관계를 연인 혹은 타인으로 구분하기엔, 그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 미묘한 관계들이 있음을. 우리는 솔로 혹은 커플이라는 양자택일의 상황에 놓여있지만은 않음을. 명명하지 않았을 뿐, 우리 곁엔 무수한 관계들이 살아있다.
따라서 그 미묘한 관계들이 주는 '새로운 친밀함'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타인 또는 연인이라는 이분법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기존 관계의 범주로는 정의하기 어려운 관계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야 한다. 영감의 잣대로 오래갈, 업무적 친밀함의 잣대로 오래갈, 삶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동반자의 잣대로 오래갈 관계들 말이다. 기존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인간관계의 친밀함을 세별화해 보면, 새로운 관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다층적인 친밀성을 수용하는 순간, 솔로는 곧 홀로라고 속단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연애가 실천이라면, 연애하지 않는 것 또한 실천이다. 연애하는 사람도 외로움을 느끼고, 연애하지 않는 사람도 충만함을 느낀다. 그러나 연애하는 사람과 비연애주의자의 삶을 완전히 갈라놓는 사회적 도식 아래, 우리는 연애와 비연애 그 중간 어디쯤을 헤맨다. 기억했으면 하는 것은, 그 과정에 놓인 모습조차 당연하다는 것이다. 겹겹이 쌓인 관계들 속에서 당신만의 선택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