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으로써 살아나다

종말의 역설을 찾아서

by 수빈

내가 좋아하는 시, '땅끝'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화자는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들더라도, 몇 번이고 땅끝에 이르러 아름다움을 마주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무슨 역설일까? 시를 곱씹을수록 삶의 위기와 희망이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사실 삶은 암전이다. 심장이 멈추고, 태동이 멈추고, 세상이 멈추면 순식간에 팟 - 하고 꺼지는 암전. 지나간 삶의 궤적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어 버리고, 현세의 기억들도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그래서인지 모두의 삶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종말을 다룬 영화를 보면, 처절하게 삶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누군가는 종말의 도래를 부정하고, 누군가는 극한의 상황에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생존하고자 하고, 누군가는 종말의 혼란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 하고......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타나지만, 종말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인물은 찾기 어렵다. (아마 그러면 영화가 재미 없어져서일까.) 종말이 겨누는 화살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그 누구도 종말을 기쁘게 맞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나 슬프게도, 우리가 종말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무관하게 세계는 움직인다.

알베르 카뮈는 인간과 세계의 간극, '부조리'를 말했다. 인간은 사적인 감정을 갖고 세계를 바라보며, 본능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세계는 어떤 의미도 내포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고요히 존재한다. 세계는 인간의 논리와 감정 밖의 영역에서 작용하며, 종말 또한 마찬가지이다. 종말은 세상이 흘러가는 방향의 종착지일 뿐이다. 종말과 세계, 인간의 간극에 우리는 무력함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힘 없이 종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까? 그렇지 않다. 종말은 역설적으로 삶과 맞닿아있다. 종말이 있기에 우리가 삶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할 기회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합리적 사고나 감정으로는 종말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오롯이 운명 앞에 놓인 개인의 실존만을 생각하게 된다. 종말 앞에서 내 삶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현존재로서 나의 본질은 무엇일까. 평소였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 질문이지만, 머릿속에서 종말을 그려 나가다 보면 자연스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종말은 삶의 역설이다. 아까 종말은 인간의 사고 바깥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했지만 - 나는 인간이라 - 의미를 부여하자면, 그렇다. 종말은 삶의 역설이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고, 종말에 대해서 사유하기에 현존재로서의 내가 있다. 그리고 난 종말을 따라 새로운 삶의 발걸음을 딛게 된다.


​ 그러니 나 또한 '땅끝'의 화자처럼 종말의 벼랑 끝으로 달려갈 것이다.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들더라도 결국엔 땅끝에 이를 것이라던 그의 말처럼.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 밀려 들어와도, 난 몇 번이고 그 끝을 상상할 것이다. 나를 둘러싼 세상을 암전 시키고, 내 삶의 고유한 의미를 찾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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