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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까지 와서 외로운 이유?

멀리서 온 편지 _ 난 지금 외롭다.

by Kunucando

새로운 달(月)이 시작되고, 새로운 계절이 시작되는 날들이지만, 밀물과 썰물의 반복은 변함이 없고, 밀물의 깊은 물속에도 응어리 한 점은 남이 있고, 바닥까지 보이는 밀물에도 낯 부끄러움은 언제나 남아 있다. '감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바람'은 내 것이라 하지만, 과연 자신의 '나만의 바람을'을 내 맘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감정'에 자유로울 수 있는 본인을 꿈꾸지만 어쩌면 그것을 순간의 시간을 잠시만이라도 잡아두려는 헛된 노력일지도 모른다.


통창과 파도소리에 잠을 깬다

통창을 뚫고 스며드는 아침햇살과 하루 종일 들어도 지겨워질 거 같지 않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깨어난다. 낭만적이고, 한 번쯤은 꿈꾸는 아침 임은 확실하다. 특별한 일정도 없고, 굳이 무엇을 하려 들지 않아도 되는 시간들의 연속. '자유'라는 말이 어색할 정도로 자유로운 시간들의 연속에서도 '감정'이라는 생명이 깨어난다. 몸과 마음의 요양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품고 있었으면서도 계속된 감정의 소용돌이를 벗어날 방법은 없다. 딱히 시간을 정해 놓은 것도 아닌데, 한 집안의 가장으로, 삶을 이어가야 하는 인간으로 이러한 호사로운 사치를 맘 편히 이어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 어느 정도 안정적인 삶이 준비되지 않는... 도망가듯 떠나온 현실에서 지금의 시간은 어쩌면 시한폭탄을 품은 듯한 불안함이 동반된 자유다. 현실로 돌아갔을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 없이 보낸 시간을 후회하게 될 듯한 불암감.


올레길을 알리는 표식과 5번 올레길 입구(지난 겨울 버젼) 지금은 더 푸르르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눈을 뜨고...

(지난 경험에 빗대어 보면) 이맘때 제주는 20도를 넘나드는 날씨로 제법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시간들이었던 거 같은데, 일주일째 10도 내외의 흐린 하늘 속에서 간간히 맑은 해를 보여준 것이 전부인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커피 한잔을 내리고, 음악을 틀고, 간단한 주변정리를 마치면... 말 그대로 '할 일이 없다'. 아침을 먹어야 하는 의무감은 있지만, 활동량이 많지 않은 시간 속에서 매일 3끼를 찾아먹는 것은 귀찮은 일을 떠나 공복의 허기를 느끼지 못해 생략하기로 한다. 간단하게 옷을 챙겨 입고, 올레길을 걷기로 한다. 숙소에서 5분 거리도 안 되는 곳에 비교적 부담 없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은 그나마 '아침 할 일(?)'을 만들어 주는 유일한 움직임이다. 작은 항구(정말 작은 항구)를 지나 '판의 미로'속으로(난 그냥 그렇게 부른다). 화려하지 않은 나무들끼리 서로 얽혀 작은 터널을 만든 '제주 5번 올레'길에 접어든다. 터널처럼 형성된 길의 왼쪽에는 화강암이 만들어낸 절경사이로 푸른 바다가 끝없이 펼쳐지고, 이름 모를 새들의 간간한 지저귐. 가끔 올레길을 걷기 위한 여행객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누가 봐도 여행객 같지 않은 나는 모습은 (운동복에 슬리퍼) 간단한 눈인사로 대신하며 자신의 길을 걷는다. 급할 거 없는 길은 '쇠소깍'까지 이어지는 다음 길로 이어지지만, 난 중간지점에서 돌아온다.


그냥 누워 책을 읽는다.


잘 정돈된 책장의 책을 한 권 빼어 들고, 통창과 마주한 간이침대(?)에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활자에 집중을 해본다. 늦은 허기가 찾아오면, 늦은 아점을 준비한다. 뭐 고급스럽게 말하자면 브런치란 말로 대체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입에 들어가는 것은 똑같은 말이니... 스팸에 계란 프라이, 간단하게 '김치찌개'나 끓일까 하다가 인근 식당으로 걸음을 옮기기로 결정한다. 식당이라고 해봤자 두 개 밖에 없지만 오늘은 외식을 해보기로 한다.


길가에 고양이 모자란 잠을 채우고, 참고로 지금 열리는 귤은 먹기보다는 관상용으로 열리는 귤이라고 함.


도보로 15분 거리에 위치한 식당으로 가는 길엔 자신의 할 일을 마친 귤밭들이 펼쳐진다. 지난겨울에 잘 익은 귤을 몇 개 따서 먹기도 했는데 이 계절의 귤밭은 조용히 잠들어 있다. 어디를 가도 바닷소리가 들리고, 고개만 돌리면 바다가 펼쳐지는 길을 걷는 것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다. 낮은 담벼락 사이에 길고양이 한 마리 모자란 잠을 채우고 있고, 돌틈사이 불안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이름 모를 다육이들의 생명력에 감탄하며 걷다 보면 어느새 도착. 몸 국 한 그릇과 소주 한 병을 시키고 난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다육이하나.jpg


어스름이 해가 기울더니 가로등 없이는 주변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이 순식간에 주변을 감싼다. 그럼에도 끊이지 않는 파도소리를 위안 삼아 이 밤을 보낼 준비를 한다.

'외롭다'

군더더기 없는 솔직한 한마디. 바다와 별이 친구네 어쩌네 하는 감성의 미화된 표현으로 포장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외롭다는 감정이 더 큰 건 사실이다.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서울에서의 분주한 삶에서 멀어지고 나니 가장 먼저 찾아오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그렇다고 이 외로움이 우울함이나 다른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것은 아니다. 이 외로움의 감정을 위해 난 먼 길을 떠나 왔으니, 그리 억울할 것은 없다. 그냥. 외롭다는 것뿐이다. 난 이 외로움이 싫지 않다.

이제 잠들어야 할 시간. 난 외로움을 맞을 준비를 한다.


불을 끄고 누우면, 파도소리만 정적을 채운다.

난 내일도 따뜻한 햇살과 파도소리를 들으며, 깨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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