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는 '제주'다
'드디어'라는 말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드.디.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제주의 생활에 마침표를 찍게 되는 오늘이다.
갑작스러운 일정에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날아온 제주의 한 달은 말 그대로 '제주'는 '제주'였다. 어느 길을 걸어도 새로움이 펼쳐지는 곳.
해안가를 걸으면 끝없이 들려오는 파도의 노랫소리가 들렸고, 숲길을 걸으면 새들의 지저귐이 함께 했다. 어느 길을 걸어도 흩뿌려지는 벚꽃잎과 아직 노란 꽃을 품고 있는 유채꽃밭과 운이 좋으면 동백의 붉은 꽃들을 볼 수도 있었고, 낯선 골목길에 접어들면 낮은 돌담에 핀 이름 모를 꽃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제주에 내려오게 된 이유는 갑작스러운 퇴사에 무너져버릴 것 같은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동굴'속으로 도망가기 위함이었다. 거기에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한 병까지 얻어, 연고가 있는 서울이 아닌 제주에서 수술을 받기 위함도 있었다. 몸도 마음도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황에서의 도피.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 했던가?
나이가 들면 몸도 마음도 쉽게 상한다. 몸도 몸이지만 나이가 드니 마음에 든 바람이 더 무서워진다. 남들은 나이가 들 수록 상처에 담담해(담담한지 그런 척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진다고 하는데, 내 마음에 난 생채기는 왜 쉽게 아물지 않는지... 아직 철이 들지 못한 것일까?
반복되는 취업과 퇴사를 겪으며, 자존감도 떨어지고 '정말 내가 능력이 모자란 걸까?' 하는 우울함이라는 그림자가 마음을 갉아먹으려 달려드는 중에 친구의 집이 있는 제주로 도망을 온 것이다. 운이 좋게도 녀석은 흔쾌히 쉬다 쉬다 지치면 올라오는 말로 나의 어리광을 이해해 줬고, 아내 역시 철없는 남편의 도피에 너른 아량을 베풀어 주었다.
제주는 언제나 나의 도피처가 되어주던 곳이지만, 이렇게 긴 시간을 홀로 보낸 적은 처음이었다. 매일의 일상을 몸이 기억하는 듯 아침 일찍 눈을 뜨게 되는 것이 신기한. 늦잠을 자고 싶어 일부러 침대에 누워 있어도 그 짧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일어나게 되는 사회적 동물의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누구도 나의 일과에 관심이 없고, 무엇을 해도, 하지 않아도 되는 절대적인 자유.
눈을 뜨면 바다의 파도소리에 하루가 시작되고, 어둠이 찾아오면 어둠으로 채워진 하늘에 셀 수도 없는 별들과 잠이 들고...
수술 후의 회복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침을 삼키는 것조차 고통의 찰나를 겪어야 했고, 진통제가 없으면 물조차 넘길 수 없는 아픔의 시간. 내가 원했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없는 외로움은, 허기진 위장을 위로해 달라는 생존의 외침보다 더 힘든 시간이었다. 바다의 푸름과 꽃들의 인사도 위로가 되지 못한 시간들. 침대에 누워 흠뻑 졌은 옷을 갈아입고 물 몇 모금을 마시는 것이 전부였던 시간들. 마음의 아픔은 돌아볼 시간도 없는 몸의 고통의 시간.
차라리, 지난 직장이었던(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회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를 차지하며, 이겨 냈어야 했는데... 그 시간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만둔 지난 시간이 자꾸 떠올랐다. 아니 그 이후에 이직한 회사들에서의 시간도 잘못(?)된 선택으로 업보가 되어 돌아오는 것 같아서 힘들었다. 그때 그냥 저랬더라면, 이랬더라면... 옳고 그름의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닌 그냥 자신을 갉아먹는 자기 연민. 내 능력에 대한 부족한 믿음이 아닌 나이에 대한 부담감.
제주에 올 때마다,
바다를 보며 마음의 안정과 더불어 새로운 각오와 해답을 찾기 위함이라는 거창한 명제를 품었었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그런 거창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지난 시간을 통해 하고 있다.
오랫만의 산행_ 한라산을 오르며, 나를 앞서가는 등산객을 바라보며 '아직 회복되지 못한 몸이니, 지금 돌아 내려가도 난 괜찮아. 내 의지가 아니라 몸이 아파서 그런 거야. 정상컨디션이면 내가 더 빨리 갈 수 있어'라는 자기 합리화. 왠지 뒤처지는 느낌이 싫어 하산을 합리화 시키려 노력하면서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기 정상이 보이는데 아무리 올라도 가까워지는 것 같지는 않고, 몸은 지쳐만 가고... 정상만 바라보기엔 내 걸음이 너무 느렸다.
한 발, 한 발 앞만 보고 걸었다. 정상은 내가 다른 길로 가지 않는 기준점 같은 목표일 뿐 내가 지금 집중해야 하는 것은 나의 걸음이라는...(너무 뻔한 얘기지만) 그렇게 그렇게 한 발, 한 발 나가는 것이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정상만 바라보면 지친다는 것을, 정상은 그냥 기준점으로 바르게 가고 있는지 가끔 확인만 하면 된다는 것.
그리고,
너무 힘들면 쉬어가도 되고, 남들의 속도에 굳이 맞출 필요는 없다는 것. 쉬어가도 목표가 정상이라면 포기만 없다면 시간의 차이 일뿐 언젠간 만날 수 있다는... 그래도 '걸어야'하다면... 굳이 '걸어야 한다'는 부담이 아닌 그냥 '발을 들면 된다'는 사실. '걷다'는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행위에 대한 부담감이라면 '발을 든다'는 것은 말 그대로 '발을 드는 것'뿐. '발을 들면'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같은 목표를 가져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에 마음가짐의 차이.
몸도 많이 아팠고, 마음도 많이 아팠다.
회복이라는 말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고통은 결국 회복은 된다.
쉽진 않겠지만,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할 일이 좀 더 집중해 보려 한다. 지금까지 내려와서도 '이제 서울 가면 뭐 해 먹고살지?'라는 물음에 자유롭지 못했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지금도 그 질문에 자유롭지는 못하다.
새로운 명제의 출현.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살 것이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시간들..
늘 그렇지만 거창한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삶에 대한 명제의 변화가 나를 어떻게 이끌지 설렘이 있다는 것이다.
제주에서 내가 바랬던 것은 '비워내기 위한 시간들'.
서울이라는 곳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금방 다시 채워지겠지만, 적어도 지난 시간보다는 좀 더 넓은 동굴을 품을 수 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그리고 앞으로는 '도피'가 아닌 '전진'을 위한 시간으로 제주를 방문할 것이다. 난 내 삶의 주인공으로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곧 창작 소설 '자살(가칭) _초안'이 연재됩니다. 많은 관심과 응원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