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후론 직접 듣지 못했다.
#사철가
내가 아주 어릴때 하얀 모시한복 입고 외할아버지가 집에 놀러 오시면 마루에 있던 턴테이블에 판소리 lp를 올려놓고 꼿꼿한 자세로 앉아 들으며 즐거워 하시던 기억이 선명하다. 늦게 날 낳은 아버지도 국악을 참 좋아하셨다. 때론 애절하고 때론 걸쭉했던 명창들의 판소리 가락이 언제나 집 안팎을 싸안고 있었다. 듣기 힘든 발음과 고풍스러운 가사가 다 이해되진 않았지만 그때부터 이미 내 몸속엔 우리 소리가 그대로 들어와 있었나 보다.
군악대 말년때 드럼파트에 모대학 국악과에서 소리를 전공하던 아이가 신병으로 들어왔다. 당시엔 노래방 기계가 대중화되지 않아 연말 장교들 연회든 대민 행사든 소(인)조밴드라 해서 전자악기와 세트드럼 구성의 군악대 오브리들이 자주 차출되어 나갔는데 (느낌상 그게 군악대장의 용돈벌이 수단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 판소리까지 구색을 맞춰보겠다는 대장의 욕심이 더해져 드럼을 쳐본적 없는 국악 전공의 아이까지 뽑아들이게 된 거다. 문제는 이놈의 몸에 박힌 리듬감이 행진곡 템포를 따라오지 못한다는데 있었다. 신병이 맡아야할 작은북은 언감생심이었고 큰북을 시켜봐도 점점 템포가 느려져서 그건 결국 내가 짊어져야 할 짐이 되었다. 하루는 차가운 데서 굴려보면 좀 정신을 차릴까 싶어 군악대 막사 뒷마당에서 연습을 시켜봤는데 문득 놈의 손을 보니 찬 겨울 바람에 터져버린 손등과 손마디에 곧 떨어질듯 핏망울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게 보였다. 갑자기 감정이 올라왔다. 불안했던 세상을 벗어나려 도망쳐 들어온 군대였는데 내가 똑같은 처지의 동년배 아이에게 지금 먼 지랄을 떨고 있는걸까 싶었다. 놈에게 상황을 들킬순 없어 멀리 떨어져 옷깃으로 서둘러 마음을 수습하고선 다시 다가가 너 정말 국악을 한거는 맞냐고 또 시비를 걸어봤다. 말도 못섞던 신병이 그때서야 초딩 때 tv에서 국악 프로를 보다가 그날로 바로 시골에서 가출해 올라와 당대 명창의 서울 집을 혼자 찾아갔고 그집에 기거하며 그이의 잔심부름과 의복 수발만 수년을 계속한 끝에 결국 소리를 전수받아 그걸로 음악대학에 들어갈수 있었다는 소설같은 얘기를 띄엄띄엄 꺼내놨다. 그렇다면 머 좀 해보라고 하고 차가운 돌의자에 앉았더니 놈이 바로 내 앞에 서서 "이산저산 꽃이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어 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라고 시작하는 처연한 단가 한 곡조를 불러내기 시작했다. 어이 없었지만 겨우 막아놨던 눈물이 또 주책없이 터져나왔다. 어릴때 들었던 판소리의 울림이 차가운 겨울날 눈덮인 막사 뒷마당에서 놈의 소리로 재현돼 사람을 허리 꺾고 오열하게 만들었나 보다. 놈이나 나나, 아니 어쩜 미래가 확정돼 있던 놈보다 쥐뿔 가진거 없이 불안하던 젊은 내 처지가 불쌍해 마지않던 시절이었다. (그날 처음 들었던 그 절절한 사철가는 몇년후 난리를 낸 서편제란 영화 한 대목에 구색으로 끼어 들어가기도 했다.)
요즘도 나는 판소리가 있는 곳을 일부러 찾아 다닌다. 방송 스피커에서 나오는 튜닝된 소리와는 전혀 다른 가슴을 쥐고 흔드는 울림이 있으니 꼭 소리꾼들의 실연으로 경험해 보길 바란다. 그 노래를 듣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결국 다 죽고 이젠 내가 늙은이가 되어 있지만 판소리에 끌리는 내 마음 안 어딘가에 그 노인네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을때 가슴이 뜨거워진다. 혹시나 해 수십년전 행진곡 템포 못따라 가던 그 군악대 후임아이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이놈도 어느덧 명창 소리듣는 국악계 큰 사람이 되어 (지금 다시 살펴보니 나라의 중요 무형 문화재로까지 지정되어 있다네. 허..) 지 고향 충청도 어느 국악원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올라와 있다. 놈 앞에서 눈물을 보인 후부터는 머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서 그냥 세월만 보내다 군악대를 빠져 나왔지만 내가 그날 흘리게 한 흰눈 위 빨간 핏자국의 기억은 놈이 겪어온 세월에 이미 다 씻겨 내려갔길 바란다.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데있나."
#판소리 #명창 #국악원 #중고제 #서편제 #무형문화재 #군대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