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를 잊게 만드는, 압도적인 발의 언어
수십 개의 탭 슈즈가 암전 속에서 일제히 무대 바닥을 때리는 소리.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시작을 알리는 이 집단적 타악은 배경으로써 반주로 머무는 것을 넘어, 하나의 미학적 선언이 된다.
수많은 탭 슈즈가 만드는 집단적 사운드는 통합된 '서사'보다 개별 ‘넘버’의 현란함을, 인물의 내면보다 군무의 기하학적 완결성을 우선했던 보드빌과 리뷰 쇼의 시대정신을 현재로 소환하는 소리다.
이 작품은 신인 배우 페기 소여의 성공담이라는 서사적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구조와 동력은 본질적으로 서사를 기능적 도구로 삼아 스펙터클의 전시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한다.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잘 만들어진 드라마라기보다, 쇼 비즈니스의 동력원이 무엇인지, 그 생산 메커니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스스로 증명하고 해부하는 무대다.
<브로드웨이 42번가>의 내러티브는 극 전체에 유기적 긴장감을 부여하기보다, 다음 무대를 위한 최소한의 논리를 제공하는 기능적 비계(飛階)에 가깝다.
극중극 ‘프리티 레이디’의 제작 과정은 자금난, 주연 배우의 연애 문제, 예민한 연출가의 신경질 등 전형적인 갈등 요소로 채워져 있지만, 이는 인물 간의 심리적 드라마를 발전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가령, 제작자 애브너 딜런이 프리마돈나 도로시 브록에게 빠져 거액을 투자하는 설정은 그들의 관계를 탐구하는 대신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관철시키고, 도로시의 부상은 페기 소여라는 새로운 동력을 무대 중심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극적 편의 장치로 작동한다.
이는 인물의 내면적 갈등과 성장이 극의 중심 동력이 되는 후대의 통합형 북 뮤지컬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작법이다. 작품의 실제 흐름은 인과관계에 따른 서사의 전진이 아니라, ‘오디션’, ‘리허설’, ‘공연 전 파티’, ‘오프닝 나이트’ 등 쇼 비즈니스의 각 단계를 보여주는 장면들의 나열에 가깝다.
각각의 장면은 독립된 볼거리를 제공하는 하나의 ‘액트(act)’처럼 기능하며, 마치 20세기 초 다양한 공연들을 한데 묶어 전시했던 보드빌 쇼처럼 구성된다.
따라서 관객의 쾌감은 페기 소여의 성공에 대한 감정 이입에서 오는 것만큼이나, 각 넘버가 제공하는 시청각적 쾌감의 강도와 그 전환의 속도에 의해 좌우된다. 서사는 스펙터클을 위한 가장 효율적인 명분으로서 존재한다.
이 스펙터클 생산 시스템의 중심에는 연출가 줄리안 마쉬가 있다. 그는 예술적 영감을 지닌 창조주라기보다, 주어진 시간과 자본 안에서 인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하여 최상의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공장장이나 지휘관에 가깝다.
그의 언어는 예술적 교감이 아닌,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지시와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5, 6, 7, 8!”이라는 카운트는 개별 댄서의 창의성을 말살하고 집단적 동기화를 요구하는 구령이며, 페기에게 외치는 “애송이로 나가서, 스타가 되어 돌아와!”라는 대사는 격려를 넘어 쇼라는 기계의 성능을 최고치로 끌어올리라는 지상명령이다.
오디션 장면에서 그는 무대 위 댄서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적 권력자로 군림하며, 그들의 육체를 개성이 아닌 기능성으로 평가한다. 이처럼 그는 쇼 비즈니스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논리를 체화한 대리인이다.
하지만 극의 마지막, 성공적인 공연 뒤 무대 뒤편에 홀로 남아 지친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의 모습은 그 역시 시스템의 일부임을 드러낸다.
그는 시스템을 통제하는 지배자인 동시에, ‘쇼의 성공’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해야 하는 가장 충실한 부품이기도 하다. 그의 존재를 통해 작품은 쇼 비즈니스의 비인격적인 속성과 그 거대한 메커니즘에 복무하는 개인의 모습을 자기 반영적으로 드러낸다.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스펙터클은 화려한 볼거리를 넘어, 그것이 탄생한 시대인 대공황의 경제적, 심리적 공백을 채우는 강력한 사회적 장치로서 기능했다.
공장의 기계가 멈추고 은행의 문이 닫히던 불확실성의 시대에, 극장은 그와 정반대되는 완전한 질서와 통제, 그리고 보장된 성공의 환상을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다.
이 무대 위에서 댄서들의 육체는 예술적 표현의 매체를 넘어, 붕괴된 현실 경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가치를 생산하는 일종의 대체 자본이자 동력이 된다.
이러한 시대적 욕망의 시각적 구현은 넘버 ‘We’re in the Money’에서 절정에 달한다. 금색과 은색으로 빛나는 의상을 입고 거대한 동전 위에서 춤추는 댄서들의 모습은 부에 대한 소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넘어선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운동의 성격이다. 한 치의 오차 없이 맞아떨어지는 탭 소리, 기계처럼 정교하게 구성된 대형은 예측 불가능한 시장과 무기력한 현실에 대한 완벽한 대척점이다.
하루아침에 노동과 자본의 가치가 사라질 수 있었던 시대에, 무대는 땀과 노력이 반드시 눈부신 결과물로 이어진다는 신뢰를 회복시키는 공간이었다.
댄서들의 격렬한 육체적 노동은 금화와 화려한 의상이라는 자본의 환상으로 즉각적으로 치환되며, 이는 마치 멈춰버린 산업 시스템이 무대 위에서나마 완벽하게 재가동되는 듯한 대리 만족을 선사한다.
더 나아가 ‘Lullaby of Broadway’와 같은 넘버는 이 환상이 품고 있는 양가적 측면을 드러낸다. 이 곡은 브로드웨이의 화려함 이면에 있는 끊임없는 노동과 소모의 순환을 노래한다.
“자장가를 들어봐, 잠 못 드는 브로드웨이”라는 가사는 잠들지 않는 도시의 리듬에 맞춰 개인의 삶을 저당 잡힌 쇼 비즈니스 종사자들의 운명을 암시한다.
넘버의 후반부, 솔로로 시작했던 멜로디가 점차 거대하고 위협적이기까지 한 앙상블의 군무로 확장되는 것은 개인이 거대 도시와 산업의 리듬 속으로 흡수되는 과정을 시청각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작품은 부와 성공의 달콤한 꿈을 전시하는 동시에, 그 꿈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비인간적인 수준의 에너지와 자기희생을 미화하고 상품화한다. 관객들은 이 압도적인 에너지 속에서 현실의 무력감을 잊고, 성공 신화라는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자발적으로 재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브로드웨이 42번가>의 무대 미학은 원작 영화의 안무가 버스비 버클리가 구축한 영화적 시선을 어떻게 무대 언어로 번역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과 같다.
버클리는 카메라의 부감숏과 클로즈업을 자유자재로 활용하여 무용수들의 신체를 개별 인격이 아닌, 만화경 속 이미지처럼 기하학적이고 추상적인 패턴으로 재구성했다. 그의 화면 속에서 댄서들의 다리, 팔, 얼굴은 거대한 건축물의 일부처럼 비인격적인 조형 요소가 된다.
뮤지컬은 카메라를 사용할 수 없는 대신, 다층적 무대 구조와 조명의 활용, 그리고 무엇보다 앙상블의 정교한 대형 변화를 통해 이러한 버클리의 시선을 재현한다.
이는 종종 신체의 특정 부분(가령,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다리나 팔)을 기하학적으로 부각시켜, 인간의 육체를 개별적 인격체라기보다 반복 가능한 시각적 모듈(module)로 취급하는 효과를 낳는다.
예를 들어, 댄서들이 바닥에 누워 다리로 원을 만들거나, 계단을 활용해 입체적인 패턴을 구축하는 안무는 무대 공간을 2차원의 스크린처럼 활용하려는 시도다.
이 과정에서 개별 댄서의 존재감은 의도적으로 희미해지고, 오직 수십 개의 신체가 합쳐져 만들어내는 전체적인 그림만이 중요해진다.
이처럼 개별성을 제거하고 집단성을 극대화하는 연출은 관객에게 개별 서사를 초월하는 순수한 시각적 쾌감을 선사한다.
페기 소여의 스타 탄생 역시 그녀의 개인적 매력이 집단 전체의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으로 기능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는 개인이 집단의 미학에 완전히 봉사할 때 가장 완벽한 아름다움이 탄생한다는, 버클리로부터 계승된 이 작품의 핵심 미학이다.
자칫 고전의 안전한 답습으로 여겨질 수 있는 이 작품에 이번 프로덕션이 가한 가장 의미 있는 균열은 바로 줄리안 마쉬 역에 여성 배우 박칼린을 캐스팅한 것이다.
이 젠더 프리 캐스팅은 관객에게 시각적 신선함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작품이 본래부터 품고 있던 권력의 역학 관계를 동시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하게 만드는 결정적 장치로 작용한다.
원작의 줄리안 마쉬가 가부장적 권위의 상징처럼 기능했다면, 여성 마쉬는 그 권력이 본질적으로 성별이 아닌 ‘연출가’라는 직위와 시스템 자체에서 비롯됨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러한 변화는 다른 인물과의 관계망 속에서 새로운 층위를 만들어낸다. 가령, 마쉬와 프리마돈나 도로시 브록의 갈등은 남성 연출가와 변덕스러운 여성 스타의 전형적 대립 구도에서 벗어나, 남성 중심적 공연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최상위 포식자가 된 두 여성의 전문성과 자존심이 충돌하는 복합적인 장면으로 변모한다.
또한, 마쉬가 페기 소여를 스타로 키워내는 과정은 가부장적 후원자-피후원자의 관계 대신, 혹독한 세계에서 살아남은 선배가 후배에게 생존의 기술을 전수하는 치열한 여성 간의 멘토링 서사로 읽힐 여지를 제공한다.
결국 여성 마쉬의 존재는 ‘쇼 비즈니스’라는 시스템의 비정함이 특정 성별의 문제가 아님을 드러냄과 동시에, 그 안에서 작동하는 여성 인물들의 관계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이는 작품의 낡은 외피를 걷어내고 그 핵심 구조를 더욱 선명하게 관찰하게 만드는 영리한 현대적 독해다.
피날레를 장식하는 타이틀 넘버 ‘42nd Street’는 극중극의 성공을 보여주는 동시에, 작품 전체의 주제를 압축하는 거대한 파노라마다. 이 장면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단편적인 모습들을 콜라주처럼 제시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리뷰 쇼다.
어두운 뒷골목의 연인, 활기찬 거리의 행인들, 위협적인 인물들의 그림자 등 서사를 갖지 않는 도시의 ‘유형’들이 연이어 등장하며 거대 도시의 혼란스러운 에너지를 무대 위에 재현한다. 이 무대 위에서 뉴욕은 작품의 배경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살아 움직이는 주인공이 된다.
이 혼돈의 중심에 선 페기는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이 아니라, 도시의 복잡하고 역동적인 리듬을 온몸으로 흡수하고 표현하는 매개체로 변모한다. 그녀의 성공은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오히려 거대 도시의 익명성 속으로 기꺼이 자신을 던져 그 일부가 됨으로써 더 큰 생명력을 얻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이는 개인의 고뇌와 정체성이 중요해진 현대적 관점과는 다른 종류의 구원을 제시한다. 고독한 개인으로 남기보다, 거대하고 활기찬 집단의 일원이 되어 그 리듬에 합일하는 것. 그것이 대공황의 절망을 이겨내고 ‘쇼’라는 새로운 신화를 탄생시키는 동력임을 이 마지막 스펙터클은 웅변한다.
결론적으로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지속적인 생명력은, 서사적 환상 뒤에 숨기보다 스펙터클의 생산 과정 자체를 거침없이 전시하는 그 솔직함과 장인정신에 있다.
작품은 보드빌의 유산을 현대 무대에 계승하며, 쇼 비즈니스의 가장 원초적인 법칙, 즉 잘 조직된 집단적 운동은 어떤 정교한 이야기보다도 강력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