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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뮤지컬의 특징, 스타마케팅에 관하여 Part 1

by Just Be

티켓 예매 창에 비친 한국 뮤지컬의 자화상


2025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른다. 누군가는 PC방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누군가는 스마트폰 시계를 0.1초 단위로 확인하며 숨을 죽인다. 이윽고 정각이 되자, 예매 사이트의 서버는 비명을 지르며 하얗게 멈춰 선다.


간신히 접속에 성공했을 때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온통 회색으로 뒤덮인 좌석 배치도와 ‘매진’이라는 두 글자뿐. 이는 전설적인 그룹의 내한 공연 이야기가 아니다. 뮤지컬의 특정 캐스팅 회차 티켓 예매 현장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풍경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페라의 유령이 30년 넘게 같은 극장에서 공연되고, 라이온 킹의 ‘라피키’가 누구인지보다 그 상징성 자체가 더 중요한 뉴욕 브로드웨이나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는 좀처럼 목격하기 힘든, 한국 뮤지컬 시장만의 고유한 자화상이다.


왜 유독 한국의 관객들은 ‘작품’이 아닌 ‘배우’, 즉 특정 스타를 중심으로 이토록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스타에 대한 단순한 팬덤 문화 현상을 넘어, 한국 뮤지컬 산업이 걸어온 독특한 성장 경로와 그 안에 복잡하게 얽혀있는 경제적 논리, 산업 구조의 특수성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본 글은 한국 뮤지컬 시장의 심장과도 같은 ‘스타 마케팅’의 실체를 다각적으로 해부하고자 한다. 그 역사적 기원부터 현재의 작동 메커니즘, 그리고 이것이 산업 생태계에 미치는 명과 암을 분석함으로써, 한국 뮤지컬 시장의 현재를 진단하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투자 방향성을 모색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내용의 깊이와 방대함을 고려하여, 이번 심층 분석은 총 2부에 걸쳐 독자 여러분을 찾아갈 예정이다.




<1장> 한국형 스타 캐스팅의 탄생과 진화


모든 현상에는 그 뿌리가 있다. 2025년 현재 한국 뮤지컬 시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스타 의존성 역시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여러 단계의 진화를 거치며 형성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산물이다. 그 시작은 화려한 마케팅 전략이 아닌, 척박한 환경 속에서의 필연적인 선택에 가까웠다.


① 필연적 선택의 시대: 전문 배우가 부재했던 태동기 (1960~1980년대)


1966년, 한국 최초의 창작 뮤지컬로 평가받는 살짜기 옵서예의 캐스팅보드는 당시 공연계의 척박했던 현실을 명확히 보여준다. 현대적 뮤지컬 양식을 수용하여 노래와 춤, 연기가 어우러지는 종합 무대 예술을 표방했지만, 정작 이 세 가지를 모두 전문적으로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국내에 전무했다.


제작진의 선택은 결국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를 ‘빌려오는’ 것이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패티김이 가창을, 희극계를 대표하는 스타 코미디언 곽규석이 연기를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이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정교한 마케팅 전략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상은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한 최소한의 현실적 고육지책이었다.


1977년, 가수 윤복희를 국민적 스타의 반열에 올린 빠담빠담빠담의 대성공 역시 이러한 맥락의 연장선에 있었다. 이미 가수로 정점에 서 있던 윤복희의 압도적인 무대 장악력은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가진 생소함을 단숨에 상쇄시켰고,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


이 시기의 ‘스타’는 생소한 장르에 대한 대중의 심리적 장벽을 허물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거의 유일한 창구 역할을 수행했다. 즉, 한국 뮤지컬은 태생부터 외부 장르 스타의 대중적 인지도에 기댈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출발했던 것이다. 이는 시장의 미성숙함이 낳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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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산업화의 서막과 ‘스타 파워’의 발견: 오페라의 유령과 ‘조승우 효과’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장은 중요한 전환기를 맞는다. 남경주, 최정원, 주원성 등 브로드웨이의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학습하고 훈련받은 1세대 전문 뮤지컬 배우들이 등장하며 비로소 장르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의 활약으로 뮤지컬은 더 이상 다른 장르의 스타에게 의존하지 않는 독립된 공연 예술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시장의 판도가 다시 한번 극적으로 바뀐 것은 2001년, 오페라의 유령이라는 초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이 한국에 상륙하면서부터다.


7개월의 공연 기간 동안 24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192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매출을 기록한 이 작품의 전례 없는 성공은, 뮤지컬이 단순한 공연 예술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장 참여자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바로 이 폭발적인 성장세의 정점에서, 영화로 막 떠오르던 충무로의 블루칩 조승우가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와 헤드윅을 연달아 평정하며 시장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 놓는다.


티켓 예매가 시작됨과 동시에 그의 출연 회차 전석이 수 분 만에 사라지는 현상, 이른바 ‘조승우 효과’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었다. 이는 유명인이 무대에 서는 것을 넘어, 스타 한 명의 ‘티켓 파워’가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장 핵심적인 변수임을 명백히 증명한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스타 캐스팅은 흥행 보증수표’라는 공식은 한국 뮤지컬 시장에서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생존과 성공을 위한 절대적인 법칙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필연적 선택의 시대가 가고, 본격적인 전략적 활용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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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팬덤 경제의 전면화: K-POP 산업과 융합과 아이돌 캐스팅


조승우가 열어젖힌 스타 캐스팅의 문은, 2000년대 후반부터 구조적 침체기를 맞은 음반 시장의 K-POP 아이돌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되었다.


핑클의 옥주현이 아이다로, S.E.S의 바다가 노트르담 드 파리로 성공적인 배우 변신을 알린 것이 그 서막이었다면, 2010년 동방신기 출신의 김준수가 모차르트를 통해 뮤지컬계에 입성한 것은 시장의 지형을 바꾼 거대한 지각변동이었다.


그의 등장은 인기 가수가 뮤지컬 무대에 서는 상징성을 넘어, K-POP 산업이 구축해 온 거대하고 조직적인 ‘팬덤 경제(Fandom Economy)’가 뮤지컬 시장으로 직접 수혈되는 역사적인 전환점이었다.


앨범 구매와 콘서트 관람으로 단련된 팬덤의 막강한 구매력과 충성도는 뮤지컬 티켓 시장으로 고스란히 이전되었고, 이는 제작사들에게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의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해주었다.


이후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EXO, 세븐틴 등 세대를 거듭하며 당대 최고의 아이돌 그룹 멤버들이 뮤지컬 무대에 오르는 것은 하나의 필수 코스이자 산업적 관행이 되었다.


이는 소속 아티스트의 활동 영역을 다각화하고 생명력을 연장하여 새로운 수익 모델을 찾으려는 연예 기획사와, 최소한의 리스크로 안정적인 관객층을 확보하고 홍보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뮤지컬 제작사의 이해관계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SM엔터테인먼트가 자회사인 SM C&C와 SM아트컴퍼니를 통해 직접 뮤지컬 제작에 뛰어든 것은, 이제 두 산업의 결합이 단순한 협업을 넘어 생존과 성장을 위한 전략적 융합의 단계로 진화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로써 한국 뮤지컬 시장은 스타 마케팅이라는 강력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엔진을 장착하고 본격적인 질주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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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스타 의존성의 구조적 메커니즘: 왜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가?


왜 이러한 ‘스타 의존성’은 시장이 성숙해진 2025년 현재까지도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강화되는 추세를 보이는 것일까?


이는 한국 뮤지컬 시장의 소비 심리, 성장 모델, 비용 구조가 서로 맞물려 만들어낸 견고한 시스템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어느 한쪽의 선택이 아니라, 시장 참여자 모두가 각자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린 결과물이기에 더욱 견고하다.


① 소비 심리 분석: ‘고가 경험재’ 시장이 강요하는 실패 회피와 안전 추구 심리


경제학적 관점에서 뮤지컬은 직접 관람하기 전까지는 그 품질과 가치를 온전히 평가하기 어려운 전형적인 ‘경험재(Experience Goods)’다. 소비자는 포스터와 시놉시스, 짧은 홍보 영상과 같은 제한된 정보만으로 수십만 원에 달하는 지출을 결심해야 한다.


특히 VIP석 기준 15만원을 넘어 20만원에 육박하는 높은 티켓 가격은 소비자에게 일상적인 문화 소비를 넘어, ‘실패에 대한 높은 위험 부담(High Risk of Failure)’을 안겨주는 일종의 투자 행위로 인식하게 만든다.


정보가 비대칭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금전적, 시간적 손실의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소비자는, 실패 확률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품질 보증 신호(Quality Signal)’를 본능적으로 찾게 된다.


이때 대중매체를 통해 이미 인지도와 실력, 매력을 검증받은 ‘스타’는 작품의 완성도를 보증하는 가장 강력하고 직관적인 신호로 작용한다.


작품의 서사나 음악에 대한 사전 정보가 부족하더라도, 대중이 사랑하는 스타의 존재는 최소한의 만족도를 보장해 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을 제공하는 것이다.


즉, 제작사가 설정한 높은 가격 정책이 아이러니하게도 소비자의 선택을 더욱 보수적으로 만들고, 검증된 소수의 스타에게 수요가 폭발적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구조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는 셈이다. 이는 작품성보다는 안정성을 추구하게 만드는 시장의 근본적인 소비 심리 구조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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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성장 모델 분석: 팬덤 주도 성장의 ‘경로 의존성’과 성공 공식의 고착화


브로드웨이가 수십 년에 걸쳐 작품 라이선싱과 극장 시스템을 중심으로 점진적 성장을 이룬 것과 달리, 한국 뮤지컬 시장은 2000년대 이후 소수의 뮤지컬 마니아층과 스타의 팬덤이라는 특정 소비 집단에 의지해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초기의 성공 방식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을 만들어냈다. 한번 특정 경로에 들어서면 과거의 선택이 현재와 미래의 선택을 제약하여 다른 경로를 선택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스타 캐스팅 → 팬덤 유입 → 흥행 성공 → 투자 유치’라는 성공 공식이 시장에서 반복적으로 증명되면서, 자본과 인력, 제작 시스템 등 산업의 모든 자원이 이 모델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초창기 공연 시장에 유입된 투자 자본은 콘텐츠 자체의 불확실성보다 스타의 팬덤이라는 확실한 수요에 베팅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투자 패턴은 제작사들로 하여금 더욱더 스타 캐스팅에 매달리게 만들었고, 이는 다시 한번 스타 중심의 흥행 성공을 이끌어내며 기존의 경로를 더욱 강화하는 피드백 루프(Feedback Loop)를 형성했다.


이러한 과정이 되풀이되면서 스타 중심의 시장 구조는 스스로를 강화하는 선순환, 혹은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했고, 작품성 중심의 다른 성장 모델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지 않는 견고한 경로를 구축했다.


이로 인해 한국 뮤지컬 시장은 브로드웨이처럼 ‘어떤 작품’이냐를 묻기보다 ‘누가 나오느냐’가 더 중요한 시장으로 그 성격이 깊게 규정되어 버린 것이다.





③ 산업 구조 분석: 제작사와 기획사의 상호 이해관계가 낳은 ‘다중 캐스팅 시스템’


이러한 소비 심리와 성장 모델이 낳은 가장 독특한 운영 방식이 바로 ‘다중 캐스팅(Multi-Casting) 시스템’이다. 하나의 배역에 적게는 두 명(더블)에서 많게는 네 명(쿼드러플)의 배우를 동시에 캐스팅하는 이 방식은, 이제 한국 뮤지컬 시장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한국 뮤지컬이 가지고 있는 상업적 관행을 넘어, 스타 의존적 시장 구조하에서 각 경제 주체들의 이해관계를 최적으로 만족시키는 고도의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첫째, 이는 글로벌 투어와 방송 활동 등으로 바쁜 스타들의 스케줄을 맞추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이다. 한 명의 스타가 3개월 이상의 장기 공연 전체를 소화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여러 명을 기용해 공연의 연속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둘째, 각기 다른 배우가 가진 팬덤을 모두 잠재 관객으로 흡수하여 전체 매출을 극대화하는 공격적인 마케팅 전략이다. A배우의 팬, B배우의 팬, C배우의 팬이 각각 티켓을 구매하게 만들고, 심지어는 다른 캐스팅 조합을 비교 관람하는 ‘N차 관람’을 유도하여 시장의 크기를 인위적으로 확장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셋째, 이는 제작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리스크 관리 수단이다. 특정 배우의 갑작스러운 하차나 컨디션 난조, 혹은 소셜미디어 시대에 더욱 치명적인 개인의 평판 리스크(Reputational Risk)가 발생했을 때, 다른 배우로 즉시 대체함으로써 공연 전체가 좌초되는 최악의 상황을 방지할 수 있다.


이처럼 다중 캐스팅은 스타 의존적 시장 구조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결과물이자, 동시에 이 구조를 더욱 공고히 유지시키는 핵심적인 장치로 작동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메커니즘은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어, 스타 중심의 시장 구조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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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1부에서는 한국 뮤지컬 시장의 독특한 ‘스타 의존성’이 어떻게 시작되고 고착화되었는지 그 뿌리를 추적해 보았다.


태동기의 필연적인 선택에서부터 팬덤 경제와의 결합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이면에 작동하는 소비 심리와 산업 구조의 메커니즘을 심층적으로 분석하며 우리는 ‘왜 우리만 최애를 보러 가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구조적인 해답의 절반을 찾았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이렇게 견고하게 자리 잡은 스타 마케팅 시스템이 과연 한국 뮤지컬 시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그 빛과 그림자를 본격적으로 파헤쳐 보겠다.


시장을 폭발적으로 성장시킨 명백한 성과와 그 뒤에 가려진 구조적 리스크, 그리고 이 거대한 흐름 속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대안과 가능성까지, 한국 뮤지컬의 미래를 가늠할 수 있는 심도 깊은 이야기가 이어가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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